■ 저자 : 이사벨라 버드 비숍 (Isabella Bird Bishop. 1831.10.15.~1904.10.7.)
영국의 여행가, 작가, 지리학자. 1892년 왕실지리학협회 최초의 여성회원. 세계 각지를 여행하였으며 흑인과 인디언들의 인권운동에 헌신. 1894~1895년 중 11개월 동안 한국을 여행하여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출간. 그녀의 한국여행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 1894.3.1. 일본 나가사키에서 부산 도착 후 제물포 거쳐 입경
4.14. 한강을 거슬러 나룻배 여행 시작. 마포-여주-원주-충주-청풍-단양 답사
5.21. 육로로 금강산 답사 시작
6.14. 육로로 원산 답사 시작
6.21. 증기선 타고 부산 도착. 청일전쟁(1894.7.25~1895.4.17) 피해 제물포 거쳐 만주 답사 시작
9월 중순. 나가사키 거쳐 블라디보스톡 도착
9월 말. 두만강 및 훈춘 답사
10월. 동시베리아 답사 후 원산 → 부산 거쳐 → 나가사키 도착
○ 1895.1.5. 제물포 도착 후 입경
1.7 이후. 고종과 민비 4차례 알현
2.5~10월. 중국 중남부 및 일본 답사
10.15. 을미사변(1895.10.8) 소식 듣고 제물포 거쳐 서울 도착. 고종 알현.
11.7~ 고양 → 파주 → 개성 → 봉산 → 평양 → 덕천 → 안주 → 순천 → 평양 답사
12월 중순. 제물포 도착
12.25~ 6개월간 중국 서부 답사
○ 1896. 6월 말. 일본행
10.20. 제물포 거쳐 서울에서 고종과 왕세자 알현. 서울의 무속신앙 등 취재
1897.1.25. 영국으로 돌아감
위 기간은 1,2차 동학란(1894.2월/4월), 청일전쟁(1894.6월∼1895.4월), 3국간섭(1895.4월), 1~3차 갑오개혁(1894.7월/12월/1895.8월), 단발령(1895.11월), 을미사변(1895.10월), 아관파천(1896.2월), 독립협회 창설(1896.7월), 고종 환궁(1897.2월) 등이 있었던 격변의 기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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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외모>
○ 중국인, 일본인과 매우 다르고, 또 모두가 다르게 생겼다. 그래서 일본이나 중국에서 유럽인들을 괴롭히고 난처하게 만드는, 사람 식별의 어려움이 한국에서는 없다.
○ 얼굴색은 검은 올리브색에서 옅은 갈색까지, 코는 메부리코에서부터 펑퍼짐한 들창코까지, 머리칼은 뻣뻣한 돼지털부터 비단결 같은 털까지, 수염은 무성한 콧수염에서 염소수염까지, 입은 넓고 두툼한 입에서부터 얇은 입까지... 한국인들은 확실히 잘 생긴 종족이다.
○ 체격은 좋은 편이고 남자들은 힘이 세서 짐꾼들은 45kg 정도는 보통으로 여긴다.
○ 명민하고 똑똑하다. 외국인 교사들은 한결같이 한국인들의 능숙하고 기민한 인지능력과 빠른 외국어 습득 재능이 있어, 중국인이나 일본인들보다 훨씬 더 좋은 억양으로 말한다.
<전체적인 한국 모습>
○ 서울은, 내가 중국 샤오싱의 냄새를 맡기 전까지는 세상에서 가장 냄새나는 도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 불결함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 모든 가정집은 개를 기르고 개구멍이 있다. 개는 서울의 쓰레기를 상당부분 해결해주는 청소부다.
○ 위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은 울창한 숲도, 광장도 없는, 그야말로 나지막한 갈색 초가지붕의 바다다.
○ 서울의 단조로운 색채는 특기할만 하다. 산들이 가진 황토색은 짙은 진흙벽에서도, 황토색 초가지붕에서도, 황토색 도로에서도 똑같이 찾아진다. 이런 단색의 도시에 오직 검은색과 흰색의 옷만 입은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다.
○ 언덕에는 사람들이 껍질을 벗겨먹어 발육이 부진한 소나무들이 있고, 대부분의 언덕받이에는 무덤들이 들어차 있다.
○ 도시 성벽으로부터 16km 내에 있는 무덤들은 이 수도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이다. 망자들은 좋은 언덕 사면의 남향 쪽을 독점하고 있다. 살아서는 칙칙한 골목길 진흙 움막에 만족하는 사람들도 죽어서는 이런 곳에서 산다.
○ 원각사 13층 석탑에서 떨어져 나간, 위 3개층을 쪼아서 기념품으로 팔고 있는 아이들.
○ 서울은 오래된 도시지만 다른 도시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매력이 없다. 어떠한 예술품도, 고대 유물 유적도, 공중의 광장도, 행사도, 극장도, 도서관도, 문단도 없다.
<주거, 여관>
○ 1.4평 되는 방에는 열기와 벌레들, 더러운 옷가지와 메주, 다른 저장물들로 가득 차 있어 겨우 누울 공간만 있다. 돗자리가 깔린 마루의 먼지를 털어내면 엄청난 먼지가 난다, 메스꺼워진 손님은 먼지더미에서 먼지 뿐 아니라 뭔가 꼬물거리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손님들 방에서 나는 짧은 신음소리, 한숨소리, 부시럭거리는 소리들은 이런 벌레의 존재에 기인한다.
○ 내가 써야 할 방은 겨우 2m × 1.8m 인데다 33도까지 올라가는 찜통이었다. ‘메주’라고 하는 썪은 콩의 덩어리에서 피어나는 냄새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게다가 모든 종류의 벌레들이 설치고 있어서 그것들이 나의 잠자리에 떨어지지 못하도록 커튼을 매달아야만 했다.
○ 구역질나는 누더기와 해초더미, 그리고 천정에도 걸어놓은 기장 이삭, 말 안장 꾸러미, 메주, 소금에 절인 생선... 앞의 지저분한 뜰 한쪽은 뒷간이고 다른 한쪽은 돼지우리였다. 이런 곳에 파놓은 우물에서 여인네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실 물을 긷고 있으니! 바깥 쪽에는 밤새 악취를 풍겨대던 수렁이 있었다. 짐승들의 끼니를 준바하느라고 방바닥 온도는 41도까지 올라갔고 이런 열기 속에서 수십 마리의 바퀴벌레와 해충들이 마지막까지 먹고 살겠다고 발악을 했다. 쥐는 말할 것도 없이 침실로 뛰어들어 양초를 먹고 가방을 갉아 놓았다. 만약 카메라 삼각대 위에 걸어놓지 않았다면 나는 부츠도 없이 지내야 할뻔 했다.
○ 방이 기분좋게 따뜻해지자 서까래를 까맣게 뒤덮고 있던 무수한 집파리들이 반동면 상태에서 깨어나 수프와 카레에 빠져죽었고, 양초불에 그을려 양초 구멍 속에 그득히 찼다. 또 내 눈앞을 수 백 마리가 기어다녔다. 다음으로 크고 작은 진딧물 군단이 각양각색으로, 사람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거대한 벼룩과 빈대 부대를 이끌고 왔다. 여러 명이 묵는 방에서 들려오느 소리로 판단하건대, 누구도 밤새 잠을 잔 것 같지 않았다.
<도로, 거리>
○ 도로의 불편함은 악명 높아 주요 도로조차 거친 승마전용 도로와 같다.
○ 더럽고 좁고 끈적거리는 마포의 거리.
○ 대부분의 골목길은 짐 실은 한 마리의 황소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인데, 그나마 퀴퀴한 물웅덩이와 초록색 점액질의 수챗도랑에 의해 더 좁아진다. 좁은 골목길, 얕은 도랑이나 수채로 인해 더욱 좁아진 골목길은 두 사람이 겨우 통행할 수 있을 정도다.
○ 좁은 거리는 초라한 오두막집들로 채워져 있다. 창문이 없는, 진흙으로 된 담벽과 짚으로 된 깊숙한 처마의 초가집, 지상 60 cm 높이의 굴뚝 구멍, 집 바깥에는 고체와 액체 쓰레기가 버려진 불규칙한 도랑, 도랑 옆의 옴이 오르고 털이 빠진 개들과 눈이 짓무르고 때가 비늘처럼 벗겨지는 아이들. 아이들은 완전히 발가벗거나 반쯤 발가벗은 채로 들끓는 악취에도 두터운 먼지와 진흙 속에서 뒹굴거나 햇빛 속에서 헐떡거리며 눈을 껌벅거리고 있다.
○ 모든 수하물은 인천에서 서울가는 소위 ‘길’을 따라 간다. 소위 길이란 실례의 말을 하는 것은 길(road)이라는 단어에 합당한 길이 없기 때문이다.
○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도로는 거의 없어 여름에는 먼지 자욱한 길, 겨울에는 눈 녹은 진창길이 되는데, 그나마 청소와 보수를 하지 않아, 길 표면은 매우 울퉁불퉁하고 돌출한 돌멩이가 많다.
<하천과 수챗도랑>
○ 더럽고 악취나는 수챗도랑은 때가 꼬질꼬질한 반라의 어린 아이들과 그 걸쭉한 점액 속에서 뒹굴다 나온 크고 옴이 오른, 눈이 흐릿한 개들의 놀이터다.
○ 널찍하고 제방이 있으며 복개되지 않은 서울의 수로에는 거무칙칙하게 부패되어가는 시냇물이 악취를 풍기는 천변을 따라 흐르고, 천변은 한때 하상에 가라앉았다가 다시 범람한 퇴비와 쓰레기 더미들로 뒤덮여 있다.
○ 좁고 긴 굽은 길에는 가는 나뭇잎과 생선 찌꺼기와 쓰레기 더미, 돼지와 옴이 오른 흐리멍텅한 눈빛의 개, 온통 부스럼 딱지가 앉은 아이들이 함께 찧고 까불며 뒹굴고 있었다. 탁한 갈색 거품으로 뒤덮인 수챗도랑은 하수구로 내려가고 그 밑으로 탁한 녹색 진흙탕이 밀려내려가고 있었다. 거기다가 도저히 맡을 수 없는 역한 냄새가 감도는 공기...
○ 개울에는 다리가 없고, 있어도 통나무에 나뭇가지를 얽어놓은 정도여서, 비가 내리면 다 떠내려가고 잘 복구되지도 않는다. 산에서 길이라고는 고작 물 마른 시내의 하상(河床)에 불과하다. 가장 나은 제물포와 서울 간의 길조차 겨울에는 30 cm에서 1.2 m에 이르는 진창 구간이 많다.
○ 한국식 다리는 강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가마니나 잘라낸 작은 나뭇가지들을 깔아놓은 것으로 언제나 구멍 투성이다. 이 불안정한 구조물들은 여름 장마 이후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마부는 항상 그것들이 튼튼한가 시험해보기 위해 앞장을 섰다.
<식사, 음식, 음주, 요리, 도살>
○ 한국 식사의 특징은 질보다는 양이라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체득된 인생의 목적은 가능한 한 많이 배부르게 먹는 것이다. 나는 한국사람들이 한 끼니에 1.4 kg 이상의 질긴 고기를 먹어치우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소화불량, 위장병, 대장염, 치질 등의 고질병이 만연되어 있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 그 탑(충주 중원탑) 가까이에는 만취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취해 버리는 것이 한국인들의 독특한 특징이다 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도 아니다.
○ 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곡주를 마신다해도 누구도 그를 짐승으로 여기지 않는다. 훌륭한 고관이 배불리 먹고 술에 취해 마루에 뒹군다 하더라도 특권 계급으로서의 권위를 잃지 않는다. 오히려 술이 깨서 제 정신이 들면, 그렇게 멋지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여유와 재력에 대해 그들의 하인들로부터 축하를 받기조차 한다.
○ 도살된 고기들은 사람들을 채식주의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염소를 도살할 때는 좁은 냇가에서 이리저리 끌고 다님으로써 염소 살코기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를 없앤다고 한다. 개의 경우 올가미를 씌워서 개들이 의식을 잃을 때까지 때린 다음 피를 빼낸다. 그것은 백주의 뜨거운 태양 아래 벌어지는 추잡하고 더럽고 측은하고 비열한 광경이다.
○ 한국의 도살 방식은 먼저 동물의 목구멍을 자르고 그 틈새에 말뚝을 박는 것이다. 그리고 동물이 죽을 때까지 손도끼로 동물의 둔부를 때리는데 그 과정이 1시간이 걸려 동물은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매질을 버티다가 결국에는 의식을 잃는다. 이런 작업 중에 피는 거의 동물의 몸 안에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그 육류는 피로 가득 차게 되며 결과적으로 더욱 육중해진 무게는 파는 사람의 이익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이를 혐오하는 외국인들은 전적으로 서울에 있는 일본 푸줏간이나 그 밖에 다른 곳에서 고기를 구입한다.
<부패, 착취>
○ 한국 관리들은 살아있는 민중의 피를 빠는 흡혈귀다.
○ 한국에 청렴한 관리의 귀감은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는 단지 두 계급, 즉 수탈하는 사람들과 수탈당하는 사람들만 있다. 그리고 그 수탈자의 무리 속에는 광범위한 관리층이 포함된다. 수탈과 횡령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습관처럼 행해졌으며, 모든 관직은 매매되고 있었다.
○ 개혁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아직도 단지 두 계급, 즉 약탈자와 피약탈자로 구성되어 있다. 면허받은 흡혈귀인 양반 계급으로부터 끊임없이 보충되는 관료 계급, 그리고 인구의 나머지 4/5인 문자 그대로의 하층민인 평민 계급이 그것이다. 후자의 존재 이유는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에게 피를 공급하는 것이다.
○ 만약 어떤 사람이 돈을 번 것으로 알려지거나 심지어 사치품인 놋쇠 식기를 샀다고 알려지기만 해도, 근처의 탐욕스러운 관리나 그의 앞잡이로부터 주의를 받게 되거나, 부근의 양반으로부터 대부를 갚도록 독촉당한다.
○ 만일 한 사람이 얼마의 돈을 모은 것으로 알려지면 관리는 그것을 빌려달라고 요구한다. 그것을 들어주면 빌려준 사람은 원금 또는 이자를 결코 받지 못한다. 만일 상환을 요구하면 그는 체포되어 조작된 죄목에 의해 부과된 벌금 때문에 투옥되고, 자신이나 친척이 관리들이 요구하는 금액을 낼 때까지 매를 맞는다. 그런 정도로 요구가 이루어지므로 겨울이 아주 추운 한국의 북부에서 농부들은 수확으로 얼마간의 현금을 가지게 될 때, 그것을 땅 속의 구멍에다 넣고 거기에다 물을 뿌리는데, 관리와 도적들로부터 안전해질 때까지 돈꾸러미는 그렇게 얼려진 땅 속에 묻힌다.
○ 상인이나 농민이 어느 정도의 현금을 저축했다는 소문이 나거나 알려지면 양반이나 관료는 빌려준 돈을 찾는다. 실제로 그것은 과세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탈세혐의로 감옥에 갇혀서 그 자신이나 자신의 친척이 요구하는 돈을 지불할 때까지 매일 아침 매질을 당한다.
○ 한 예로 남쪽 지방의 어느 마을의 경우, 전봇대가 필요해서 그 지역 지사(관찰사)가 각 호마다 100 푼씩을 징발했다. 지방 수령이 그것을 200푼으로 올렸고 그 고을의 아전이 250푼으로 올렸다. 실제로 사람들은 250푼을 냈고, 아전이 50푼, 지방 수령이 100푼, 그리고 지역 지사가 100푼을 가졌는데, 그 100푼 중 일부만이 부과되었던 목적에 사용되었다.
○ 모든 한국 사람들은 가난이 그들의 최고의 방어막이며, 그와 그의 가족에게 음식과 옷을 주는 것 외에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은, 탐욕스럽고 부정한 관리들에 의해 빼앗길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 한국 어부들은 아무런 구실도 없이 수탈당할 것이 뻔한 돈을 굳이 벌려고 들지 않고, 다른 생산 계급 일반과 마찬가지로 가난을 방패막이로 삼고자 한다.
○ 엄청난 권력 남용, 공금 낭비가 성행할 뿐 아니라 통치체제 자체가 이미 거대한 권력의 남용, 국익의 낭비였다. 현재 한국의 통치 체제는 모든 인생을 근면과 생업으로부터 파산시키고 강탈해가면서 바닥도 끝도 보이지 않는 몰락과 부패, 타락으로 출렁이는 거대한 바다에 비유할 수 있다. 관직과 재판 판결이 다른 상품과 다름없이 사고 팔렸으며 정부는 급속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정부의 단 하나 남은 권한은 피지배자들을 먹이로 삼을 수 있는 권리 뿐이었다.
○ 여주 관아에는 한국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기생충들이 우글거렸다. 거기엔 티롤 모자를 쓰고 조잡한 면직 제복을 입은 군인과 포졸들, 문필가들, 부정한 관리들, 늘 일이 손에 달린 척 하는 전령들이 있었고, 많은 작은 방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마루에 앉아 서예 도구를 옆에 놓고 긴 장죽에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 평안도라는 단 하나의 지역에 당시 44명의 지역관리가 있는데 각각 평균 4백명의 부하를 지니고 있다. 그 부하들의 임무라는 것은 그들의 식량인, 1년이면 392,400 달러가 되는 세금을 매월 나누어서 걷어들이는 것이었다. 생계급료를 받지 않는 17,600명의 군대는 그들 자신의 수입을 농민으로부터 ‘받아낸다’. 한국의 농민들은 이 모든 기생충들의 최종적인 부양자라는 것 이외의 권리나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형벌>
○ 관청 포졸들에 의한 야수적인 채찍질로 때로는 범인을 숨지게도 하는데, 그 괴로운 울부짓음이 옆에 있는 영국 선교소의 방에 파고든다.
○ 고문은 최소한 명목상으로는 사라졌다. 그리고 참혹하게 잘려진 머리와 머리가 잘린 몸체가 야만적으로 민중들에게 보여진다든지, 너무 심하게 고문해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고가는 광경은, 일본의 지배 기간 동안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2년 전에 나는 사람의 잘린 머리가 사람들이 많은 서울 거리의 부지에 널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머리가 없는 몸통들이 동대문 밖 거리에 피가 배어있는 채로 널려져 있음을 보았다. 미국인 선교사 '알렌' 박사는, 1896년 최근 넉 달 동안의 변화(갑오경장)가 그가 한국에 머물렀던 전의 12년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 내가 방문한 날 죄수들은 떨고 있었는데, 너무나 심하게 떨어서 마치 나에게 동정심을 구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때 감옥의 온도는 영하 8도였으며 이는 너무나 추운 온도다.... 각각의 평범한 방에는 18~20명의 죄수들이 있었으며 50명의 죄수들은 넓은 방에서 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의 몇 명은 선고를 받았으며 2명은 사형을 선고 받았는데, 그 50명의 죄수들은 나무로 된 긴 형틀을 쓰고 있었다....
○ 어떤 선고의 경우는 부당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면 연료로 쓰이는 소나무 장작을 패고 그 다발을 옮겼다는 죄목으로, 노쇠한 노인이 3년 동안 감금된 채로 처벌을 받는 경우가 있었으며, 심지어는 한 눈 먼 노인이 화가 나서 어떤 무덤을 모독했다는 이유만으로 10년이나 투옥되기도 했다....
○ 나는 동학 주동자들(김개남과 성재식 등)의 효수된 모습을 서소문 밖의 어느 시장 거리에서 보았다. 마치 야영장에서 쓰는 주전자대처럼 나뭇기둥 3개로 얼기설기 받쳐놓은 구조물에 다른 사람의 머리 하나가 그 아래로 늘어뜨려져 매달려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도 같은 구조물들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들이 무게를 지탱할 수 없어 무너지게 되면, 먼지 수북한 길바닥에 그냥 나뒹굴도록 내버려져 개들이 몰려와 물어뜯기에 안성맞춤이 되었다. 그곳에 고장난 회중시계가 떨어져 있었는데, 어린 아이들이 그것을 조각조각 분해하여 개에게 물어뜯긴 시체의 입 속에 장난으로 처넣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이 1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 사흘 후 우리는 서울 동쪽 문과 남쪽 문 밖 소나무가 울창한 야산들 사이의 평평한 밭길로 달렸다. 우리는 그 추운 날씨에 면으로 된 여름 홑옷을 입은 채로 길가에서 자고 있는 3명의 인부들이 이상하다 싶어 가까이 가 보았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자세였지만 실은 머리가 없는 몸뚱아리 뿐인 시체였던 것이다. 그 길 한복판에는 얼어붙은 선홍색의 핏자국이 선명하였다. 그곳은 바로 동학의 지도자들이 그들의 반역죄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사죄를 구했던 곳이었다.
<여성과 가정>
○ 한국 여성은 모두 최하층 계급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한국 여성은 다른 어떤 나라의 여성들보다도 더 철저하게 예속된 삶을 꾸려가고 있다.
○ 한국의 여성들은 항상 멍에를 짊어지고 산다. 그들은 남자와의 차별을 자신의 자연적인 몫으로 받아들인다.
○ 여자는 결혼에 의해 운명을 완성한다. 7살부터 아버지의 집 안뜰에 완전히 갇혀 살던 소녀는 다시 17세를 전후하여 시아버지 댁 안방에 갇혀 살게 된다. 친정의 구속이 파괴되면 그 때부터는 남편의 집이 그녀의 감옥이 되는 것이다.
○ 상류층에서는 시아버지 앞에서의 '침묵의 법도'는 더욱 엄격하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눈을 쳐든다거나 말 한 마디를 건네는 일 없이 몇 년을 보내기 일쑤다.
○ 이 흰 옷, 특히 겨울에 흰 솜을 채워넣은 옷을 입는 것은 여성의 고되고 간단없는 노동을 필요로 한다. 외투는 씻을 때마다 반드시 실을 빼서 풀고 다시 꿰매야 하며, 몇몇 긴 솔기는 종종 풀을 먹여야 하지만 훨씬 더 많은 바느질을 해야 한다. 그 외에도 한국의 농촌 여성들은 가족의 모든 의복을 만들고, 모든 식사를 준비하고, 무거운 공이와 절구로 쌀을 탈곡하고, 씻고, 무거운 짐을 시장까지 머리에 이고 나르며, 또한 물을 긷고,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나가 밭에서 일을 한다. 그들은 일찍 일어나고 자정이 넘어서야 휴식하며, 틈날 때마다 실을 뽑고 베를 짠다. 대개 많은 아이들을 갖는데 아이들은 3살까지 젖을 떼지 못한다. 농촌 여성에겐 기쁨이 없다고 말해도 될지 모른다. 그녀들은 자신의 며느리에게 고된 일의 일부를 물려줄 때까지 단지 막일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고된 노동 때문에 한국의 농촌 여성들은 30대에 이미 50대로 보이고, 40이면 종종 이가 없어진다. 개인적인 몸치장조차도 인생의 아주 이른 시절에 그녀의 삶에서 사라진다.
○ 상류사회에서는 절대적 격리가 하나의 규범이 된다. 방문객은 절대로 가족 중의 여성에게 눈짓을 보낼 수 없다. 그들의 안부를 묻는 것은 예의를 많이 벗어나는 것이고, 마치 그녀들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정중한 손님의 의무이다. 여성들은 어떠한 지적 교육도 받지 않고 모든 계층에서 열등한 지위를 갖는다. 어떤 종류의 이원적인 철학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으나 한국 남성들이 생각하는 자연(自然)은 여성이 열등한 존재로서 남성에 부속된 상태이다.
○ 딸들은 아버지에 의해, 아내는 남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여성들은 심지어 자살까지도 한다. '달레'(Dallet)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이방인이 우연이건 계획적이었건 그들의 손을 건드리게 되면 이런 여성들의 사회에선 난리가 나는 것이다... 법은 어떤 남자도 여성의 방에 들어갈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선비가 그의 아내의 방 안에 자신을 숨기고 있을 때, 모반을 제외한 어떠한 범죄로도 그를 잡지 못한다. 자기 집의 지붕을 고치려는 사람은 우연히 자신이 옆집 여인을 보는 것을 막기 위해 이웃에게 반드시 알려야 한다. 여자는 결혼할 때까지 아버지와 남자 형제를 제외한 어떤 남성도 보지 못하며 엄격하게 격리되어 있다.
○ 글을 읽을줄 아는 한국여성의 숫자는 1천명 가운데 2명 정도로 평가된다. 이처럼 미신, 남자들로부터의 잘못된 교육, 문맹, 극히 낮은 법적 권리, 그리고 냉혹한 관습은 세계의 다른 어떤 국가보다 더 낮은 지위를 여성에게 안겨주고 있다...
○ 지금까지도 여성은 남편과의 이혼에서 무력하며, 결혼에서의 상징적인 조각품인 원앙새로 표현되는 부부간의 정절은 절대적으로 여성만의 미덕이 된다. 남편은 아내를 부모와의 불화, 질투, 그리고 잘 싸우는 기질 등 온갖 이유로 쫒아낼 수 있다...
○ 한국인에게 집(house)은 있으나 가정(home)은 없다. 남편은 대부분 아내와 떨어져 생활한다. 부부 사이의 친밀함을 맺어주는 어떤 공통된 유대나 외적인 이해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에 있어서 결혼 관계란, 그 주제에 관해 나와 대화한 한 한국 선비의 언급에서 잘 요약된다. “우리는 아내와 결혼하고 첩과 사랑을 나눕니다.”
<빨래>
○ 한국 여인들은 빨래의 노예다. 냄새나는 하천에서, 궁궐 후원의 우물에서, 전국 방방곡곡의 모든 물 웅덩이에서, 아니 주택 밖 실오라기만한 개울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한국 여인들은 빨래를 하고 있다. 빨래판에 억척스럽게 문지르고, 빨래방망이로 힘겹게 두드리고, 빨랫줄에 널어 말리고, 다시 다음잇돌에 올려 광택이 날때까지 한없이 두드린다. 서울의 깊은 밤, 그 괴괴한 정적을 깨뜨리는 유일한 소리는 다듬이 방망이의 그 씁쓸한 소리다.
○ 모든 시냇가에는 평평한 돌에 웅크리고 앉아서, 더러운 옷을 물 속에 담그고 꽉 비틀어 짜서 돌판에다 올려놓고 반반한 방망이로 두드리며 빨래하는 여자들이 가득하다... 한국식 빨래의 첫 공정은 나무나 짚을 태운 재를 물에 풀어 빨래감을 적시는 것이다. 그렇게 잿물에 담가둔 빨랫감을 다시 두드려 빤 다음, 맑은 물에 헹구고 짜서 빨랫줄에 넌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 하얗게 마른 후 밥풀로 아주 엷게 풀 먹여지고, 곤봉처럼 생긴 다듬이방망이로 나무 롤러 위에서 짧고 빠르게 얼마동안 두드려진 보통의 흰 무명은 그 깨끗함이 막 뽑아낸 흰 세틴과 같다.
<교육>
○ 지금까지 한국의 교육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애국자, 사상가, 정직한 시민들을 배출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생도들은 그들 앞에 중국의 책들을 펼쳐놓고 마루 위에 앉아 상체를 나란히 좌우로 난폭하게 움직이면서 또는 앞뒤로 움직이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높고 큰 소리로 중국의 한자를 외우고 고전을 공부했다. 그리고 중국의 현인들과 신비로운 중국의 역사를 외웠다....
○ 관직은 한국인들의 가장 큰 야망이요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교육은 사고력을 개발하거나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는 현실적인 세계를 이해하도록 하지 못했다.... 이같은 교육은 학생들에게 협소하고 편협하고 독단적이고 건방지고 잘못된 자존심을 심어준다. 그리하여 그 자존심은 노동을 경시하는 개인주의적 에고를 만든다. 공공의 선을 생각하는 정신을 파괴하고, 사회적 신의를 파괴하며, 행동과 사고를 2천년 간의 진부한 관습과 전통으로 옭죄고, 좁은 지적 견해, 낮은 도덕적 감각 그리고 여성에 대한 경멸을 초래한 그 원흉은, 기본적으로 퇴보적이고 경직된 한국의 교육제도이다.
○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과 관련하여 1896년 말에 출판된 ‘유학자들의 위도와 경도(즉 세계)에 관한 안내서’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겠다. 이 책은 학부대신인 신기순에 의해 편집되고, 학부의 두 고문관에 의해 서문이 씌어졌으며, 국고 비용으로 출판된 것인데,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유럽은 세계의 중심 즉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다. 게다가 러시아인, 터키인,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그리고 벨기에인들은 사람보다는 오히려 새나 짐승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가금의 울음처럼 들린다.”
“... 최근 세대의 관점에 따르면, 서양인들이 카톨릭이라고 부르는 종교는 저속하고 그 깊이가 얕은데다가 오류가 많다. 그리고 이는 야만적인 관습의 타락을 보여주는 하나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래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그들은 하늘의 영혼을 숭배한다. 그러나 조상님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는 야만적인 타락성의 한 형태이다.”
“... 세계의 중심인 중국의 황제는 얼마나 위대하며 고귀한가.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며 부유하다. 세계에서 위대한 이들은 모두 중국인들이었다.”
<경제, 화폐, 인플레>
○ 100엔(10파운드)을 현금으로 바꾸면 운반하는데만 6명의 사람 또는 조랑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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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화 70개를 바꾸어 장정 6명이 배까지 날랐다.
<질병, 의료, 종교, 장례>
○ 한국의 승려들은 무척 무식하고 미신적이었다. 불교의 역사나 교의에 대해서, 불교의식의 취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채로 대부분의 승려들이 그저 몇 마디 음절들만을 공덕을 쌓느라고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예불은 그들 스스로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산스크리트어 또는 티벳어의 몇 마디 말을 중얼거리거나 큰 소리로 뱉어내는 것일 뿐이었다.
○ 정령숭배는 왕국 전역에 걸쳐 만연되어있고 대중들과 여성들을 장악했다.
○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궁정에 거주하는 왕족을 비롯해서 빈궁한 초가집에 거주하는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녀자와 대다수의 남성이, 1500년 이상이나 한국에 존재하여 왔으며, 불교에 영향을 끼치고 아마도 불교에 의해 변형되기도 했을 그 관습의 형태를 시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무당이라고 분리는 주술사에는 크게 ‘판수’와 ‘무당’이라는 두 부류가 있다. 판수는 맹인 점술사를 이르는 말로 무당보다 격이 낮다. 장차 판수가 될 눈 먼 아들을 둔 부모들은 운이 트였다고 하는데, 그 눈 먼 아들이 장차 판수가 되면 확실히 생활이 풍족해지며, 그 때문에 부모가 나이가 들어서도 판수는 그들을 부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비가 살아있을 때 몇몇 판수는 참판 혹은 승지의 벼슬을 받기도 했으며 특권을 누렸다.... 무당을 부르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비싸다. 무속사업은 매년 2억 50만 달러가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한국인들은 하늘과 땅과 별과 공기와 산과 강과 바다에 귀신이 가득 차 있다고 믿는다. 심지어 귀신은 그늘진 나무, 계곡, 맑은 샘, 그리고 산마루에도 자주 들른다. 녹색의 언덕 비탈 위에, 농사가 지어지는 평화로운 계곡 속에, 풀이 우거진 골짜기에, 나무가 많은 고지에, 길과 강 옆에, 심지어는 동서남북 어디에나 귀신은 널리 도사리고 있으면서, 사람의 운명에 대해 극히 음성적인 장난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고 믿어진다. 또 귀신들은 지붕, 천장, 아궁이, 광과 석재 어디에든 있다. 그들은 굴뚝과 헛간과 마루와 부엌을 채우고 있다. 심지어 선반과 단지에도 있다.... 귀신은 수백 종으로 추정된다...
○ 한국의 가택 어디에선간에 귀신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귀신은 삶의 모든 면에서 한국인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그들이 부귀를 유지하기 위해서 귀신을 달래는 행위를 계속 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귀신은 그들에 대한 숭배가 소홀할 때는 가차없는 재난으로 보복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결국 평생 동안 귀신에 대한 노예적인 복종 밑에 있게 될 수 밖에 없다....
○ 한국인들은 그들이 불행해지는 것이 악귀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어떤 직무에서 오는 불운, 공직에서의 불신, 질병, 일시적이든 지속적이든간에 금전을 잃는 따위의 모든 불행이 다 악귀의 영향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판수나 무당이 그의 힘으로써 재앙들을 종결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어쨌든 무당이 없는 곳에서 산다는 것은 한국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믿음은 그들을 소심한 불안에서 영구히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이 믿음은 그들에게 끝 없는 공포를 야기시켜서 그들에 대해서는 확실히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을 듯하다. “한국인은 현재의 시간을 항상 공포에 떨면서 보낸다”.
○ 질병이 귀신의 소행이라는 한국인들에게 널리 퍼져있는 믿음 때문에, 병자가 발생하는 저택 어디에서나 판수나 무당이 행하는 직책은 한국에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남녀 무당을 함께 고려해볼 때, 무당은 민중들에 대한 거대한 힘을 소유하는데, 그 계층의 범위는 왕자의 미래를 위하여 판수를 자주 찾는 영리하고 야망이 있는 한국의 왕비로부터 저 밑으로는 가난한 농민 가정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다.
○ 유럽의 의학과 수술법은, 나라 전체를 사로잡고 있는 이런 야만적이고 저급의 체계를 가장 성공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 것이며, 의학적인 선교에 관련되어 실행됨으로써, 많은 면에서 꽤 문명화된 사람들과 하층민들은 점차 미신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 죽음과 매장에 관한 한국의 예법은 특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 남자나 여자나 앓기 시작하면 무당 즉 마법사를 불러 병을 낫게 해달라는 주술적인 의식(굿)을 행한다. 한국의 장례 예법은 어떠한 성직자도 죽음과 장례에 관련된 식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 죽은 이후의 생이 염라대왕의 심판과 산신령의 보살핌, 이 두 가지 세계에 배분되어 있다는 관념 등 매우 독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 그날 우리는 세 번의 장례를 보았다. 첫 번 째는 길을 가득 메운 일본군 부대가 한국인의 장례행렬과 맞닥뜨리자 길 좌우로 늘어서서, 행렬 속의 사람들 중 어떤 사람에게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한 뒤, 그 사이로 시신이 지나가도록 하는 광경이었다.
<청일전쟁 후의 평양>
○ 2~4천 명의 사람들이 수백 마리의 마소와 함께 학살되고, 기병들이 문자 그대로 수백 명씩 쌓여 있어, 인간과 말의 언덕을 이루고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3주 후에 그곳에 갔던 ‘모페’ 씨는 심지어 그 광경을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참사”라고 말했다... 그리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 검게 변색되고 썪고 있는 시체 더미 구석구석에서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개들이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전장을 둘러봤을 그때까지도, 비록 다음 해의 곡식이 그곳에서 익고 있었지만, 사람의 두개골, 갈빗대가 달려있는 척추, 팔들, 손들, 모자, 벨트와 칼집이 달려있는 척추뼈를 볼 수 있었다.
○ 8만의 인구를 가진 번창하던 평양은 쇠락하여 1만 5천의 주민만이 남아 있었다. 가옥의 4/5가 부서졌고 거리와 골목길은 쓰레기로 꽉 차 있었으며, 언덕은 무너지고 한 때 가옥들로 붐볐던 골짜기엔 기분 나쁜 잔해들.
○ 부서진 벽의 파편들, 마루, 굴뚝, 지붕과 벽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뒤죽박죽 섞여 이루어진 흙더미들로 뒤덮여 있었다... 이 모든 잔해들은 적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재건을 위해 싸운다는 사람들에 의한 것이었다...
○ 점령기간 동안 일본 군대는 정당하게 행동했고 마을과 이웃에서 거둬온 전리품들에 대해 꼼꼼하게 배상했다. 사람들은 일본군들을 아주 미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 의해 평화로운 질서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평양 사람들은 근대적으로 훈련받은 이 일본군들이 떠나고 나면, 시민들의 권리를 얕보고 시민들을 무수히 폭행하고 강탈하는 한국의 구제 군대가 그들을 괴롭힐까봐 매우 걱정했다...
○ 그리하여 좌(좌보기) 장군은 성문과 274m 채 떨어지지 않은 평양 근처에서 최후를 맞이한 듯하다.... 둥글게 난간이 쳐진 깔끔한 방첨탑이 그가 전사했다고 추정되는 지점에 일본군에 의해 세워졌다. 그 한쪽 면에는 ‘평진지방의 총사령관 좌보귀 여기서 죽다’ 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고, 다른 면에는 ‘평양에서 일본 육군과 교전 중 장렬히 전사하다’라고 씌여져 있다. 훌륭한 적장에 대한 우아한 찬사인 셈이다...
<시베리아 한인촌에서 희망 발견>
○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을 세계에서 제일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곳 ‘프리모르스크’에서 내 견해를 수정할 상당한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한국인들은 번창하는 부농이 되었고, 근면하고 훌륭한 행실을 하고 우수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변해갔다. 이들은 대부분 기근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배고픈 난민들에 불과했었다. 이들의 번영과 보편적인 행동은 한국에 남아있는 민중들이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천천히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내게 주었다.
<고종과 민비>
○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칠흙같은 흑발이었고, 피부는 너무 투명하여 꼭 진주빛 가루를 뿌린 듯 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
○ 나는 네 번 왕비를 만났는데, 그 때마다 왕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녀의 사려깊은 친절, 특출한 지적 능력, 통역자가 매개했음에도 느껴지는 놀랄만한 말솜씨 등 모두가 그러했다.
○ 아들의 병약함은 왕비로 하여금 몇 가지 부적절한 행동을 하게끔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점쟁이에게 계속적인 도움을 청했으며, 절에다 바치는 시주는 자꾸 늘어만 갔다. 알현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어머니와 아들은 줄곧 손을 꼭 잡고 있었다.
○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 왕비는 왕을 몹시 채근했다.
○ 관료들 중 가장 악명높은 악당이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김옥균의 암살을 사주한 살인자가 탁지부대신이 되었고, 뇌물 수수로 고발된 바 있는, 오직(汚職)으로 악명높은 전과자가 법부대신이 되었다. 관직의 공공연한 매매가 줄을 이었고, 국정을 악용하여 이권을 거머쥐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단 며칠 동안이라도 고위 공직에 임명된다는 것은 그에게 평생을 두고 우려먹을 지위를 주는 것이며, 중요한 이권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국왕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이 될 이런 사실을 써야만 한다는 것이 괴롭다.
○ 왕은 한국 왕조의 건국 이래 500년을 이어져 내려온 전통의 산물이다. 그 전통이 실제로 가르쳐주고 있는 바는, 왕에게 있어 공중의 사업과 국가의 이익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하게 말하면 관직을 주고 총신에게 봉급을 주는 것이며, 왕의 정치가로서의 능력은 권력이 센 장관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른 한 장관을 키우는, 이른바 상호 대립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단발령> - 1895.12.30. 단발령 발표
○ 고위 관료까지도 ‘자르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딜레마에 빠졌다. 만약 그들이 머리카락을 자른다면 그들은 격분한 주민들에 의해 그들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어쩌면 목숨까지 잃을 위험이 있었다. 반대로 상투를 유지한다면 그는 즉시 정부로부터 해임될 것이다....
○ 나라는 상투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와 고통과 어려움으로 온통 들끓었다. 사업차 서울에 올라왔다가 머리를 깎인 지방민, 상인, 기독교 전도사 등등의 사람들은 감히 그들의 목숨을 걸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도성 안에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자 목재, 토산물들이 들어오지 못했고, 생필품 가격은 심각하게 치솟았다. 서울의 성문, 궁전, 관공서마다 머리깎는 소리가 들렸다...
○ 어떤 아버지는 그의 두 아들이 칙령에 복종하여 머리를 깎은 그 비탄과 치욕을 못이겨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머리카락 잘린 사람들은 성난 지방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 감히 서울에서 멀리 떠나지 못했다. 춘천에서는 수령이 법령을 집행하려 하였을 때, 주민들이 무리지어 일어나 수령을 죽이고 그가 내린 모든 법령을 폐기했다...
○ (아관파천 후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고, 군인들에게 '돌아와 짐을 보호하라, 반역자들의 머리를 잘라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리자)... 연이어서 같은 날 수천 명의 백성들이 단발령을 취소하는 명령을 읽었고, 체포가 가능했던 관료들, 관청의 집무실을 지키다 체포된 총리대신(김홍집)을 비롯해서 농부대신(이병하), 탁지부대신(어윤중)은 붙잡혀서 거리에서 참수를 당했다. 격분한 군중들은 상투를 자르게 한 장본인이 총리대신이라고 간주하여, 정말 잔인하게 시체를 모독하고 손발을 잘라내는 등 극도의 야만성을 보였다.
<정치, 외교, 한국의 운명>
○ 나는 출발 전에 먼지와 불결함, 쓰레기에 에워쌓인채 여관 마당의 거적더미에 쭈그리고 앉아 우리를 구경하고 있는 덕천 사람들을 보았다. 냉담하고 더럽고 얼빠져 보이는, 가난에 절은 얼굴로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한국이 가망없고 무력하고 불쌍하고 측은한, 어떤 큰 힘에 의해 튕겨다니는 배드민턴 공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의 국민들이 오직 과세(課稅)를 위한 지배가 아니라 산업의 발전을 위한 지배 아래에 있었다면 이같은 사정은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 근사한 기후, 풍부하지만 혹독하지 않은 강우량, 기름진 농토, 내란과 도적질이 일어나기 힘든 훌륭한 교육, 한국인은 길이 행복하고 번영할 민족임에 틀림 없다. ‘협잡’을 업으로 삼는 관아의 심부름꾼과 그들의 횡포, 관리들의 악행이 강력한 정부에 의해 줄어들고, 소작료가 적정히 책정되고 수납된다면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나는 한국의 농부들이 일본 농부처럼 행복하고 근면하지 못할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그것은 내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생업에서 생기는 이익을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모든 개혁의 시도들은 너무 조급하게 시작되어 너무 빨리 조각나 버린다. 일본이 지도한 개혁은 국가적인 관례에 끼어들고 작은 문제에 간섭하기를 좋아함으로써 한국인들을 분노하게 했을 뿐이다. 곳곳에 드러나는 사건들을 보고 내가 판단하건대 일본이 한국의 개혁을 부르짖는 목적은 한국을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한 명분을 축적하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 어쨌든 왕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편히 지내는 그 기간 동안 한국에 이익이 되는 일이 없었다는 사실과, 현재의 정치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일본이 한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간 동안 행해진 정치와는 대조가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왜냐하면 일본이 한국에서 행한 정치는 야만적이고 잔인했지만, 거시적으로는 한국의 진보와 정의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한국은 특권계급의 착취, 관공서의 가혹한 세금, 총체적인 정의의 부재(不在), 모든 벌이의 불안정, 대부분의 동양 정부가 기반하고 있는 가장 나쁜 전통인 비개혁적인 정책 수행, 음모로 물든 고위 공직자의 약탈 행위, 하잖은 후궁들과 궁전에 한거하면서 쇠약해진 군주, 가장 타락한 제국 중의 한 국가와의 가까운 동맹, 흥미있는 외국인들의 서로의 질투, 그리고 널리 퍼져 있으며 민중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미신, 자원 없고 음울한 더러움의 사태에 처해 있다. 그 속에서 나는 한국의 첫 인상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한국의 바다에, 땅에, 간난에 견딜 수 있는 국민 속에 있음을 보았다....
○ 원칙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고, 한국의 혁명가는 어떤 신념을 지지해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는다. 강인하고 평균적인 지능을 가진 수백의 사람들이 이 순간에도 모든 것에 빌붙어 살고 있다. 명예로운 독립심을 모르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을 불명예스럽게 했던 것이 바로 이 매관매직이었다...
○ 한 연구자는, 한국에서 ‘일(work)’이란 단어는 손해, 악, 불행의 의미를 지닌다고 진술한다. 나태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곧 상류사회에서의 지위권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이 관직에 임명 받으면, 나라의 월급을 축내고 수뢰(收賂)를 받는 일 외에는 할 일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 나는 실제로 노동하는 땅의 경작자가 이 모든 기생충들의 부양자라는 것을 거의 싫증이 나도록 반복했다. 한국에서 농부들은 가장 열심히 일하는 계급이며, 비록 다소 원시적이지만 땅과 기후에 잘 적응함으로써 자기 노동의 생산량을 쉽게 배가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익이 안전하게 보호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가족을 먹여 살리고 옷을 입힐 정도로만 생산하는데 만족해하고, 더 좋은 집을 세우거나 품위있게 옷을 입으려고 하지 않는다. 수많은 소작농들이 양반과 행정장관들의 가혹한 세금과 강제적인 대부금 때문에 해마다 경작 평수를 계속해서 줄이고 있으며, 하루 세 끼를 마련할 수 있을 정도로만 경작한다....
○ 한국은 이런 전망 없는 상황 속에서 교육으로써, 생산계급들을 보호함으로써, 부정직한 관리들을 처벌함으로써, 그리고 모든 관직에 실무적인 테스트를 부과함으로써, 즉 실제로 일한 것에 대해서만 지불함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만 한다. 그런 개혁이 확고하고 능력있는 책임자의 감독 하에 수행되어진다면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 일본과 서양교육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한국의 소작농은 기생충들의 부양자로 살아가는 운명이 피할 수 없는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공민권, 법 앞의 평등, 그리고 소득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천천히 깨달아가고 있다.
○ 나는 한국에서 거의 1년을 보내면서 그 동안 그 국민을 나의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비록 한국인들이 여러 세기에 걸친 불이익을 당했지만, 또 1897년의 뚜렷하게 퇴보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코 그들의 장래를 절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가지 사항은 필수적이다. 첫째, 현재 내부에서 한국을 개선할 세력들을 찾기 어렵기에 한국의 개혁을 위한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둘째, 군주의 권력이 엄중하고 영속적인 헌법상의 제어 하에 두어져야만 한다는 것.
○ 예측은 위험한 일이지만, 만약 러시아가 예상되는 것처럼 조용한 발전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에 관해 어떤 공격적인 계획을 표명한다면, 일본은 한국에서 러시아를 거형(車刑)에 처할 수 있을만큼 강력하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한국은 정녕 홀로 지탱할 수 없고, 만약 공동 보호국 같이 매우 어려운 문제가 협정될 수 없다면, 일본이나 러시아의 후견 하에 있어야 한다.
○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의 운명을 놓고 서로 대결한 상태에, 내가 한국을 떠나게 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내가 처음에 한국에 대해서 느꼈던 혐오감은 이젠 거의 애정이랄 수 있는 관심으로 바뀌었다. 이전의 어떤 여행에서도 나는 한국에서보다 더 섭섭하게 헤어진 사랑스럽고 친절한 친구들을 사귀어보지 못했다. 나는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의 겨울 아침을 감싸는 푸른 벨벳과 같은 부드러운 공기 속에서 눈덮인 서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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