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조선잡기(朝鮮雜記)

계명산 2022. 12. 13. 21:52

* 저자 : 혼마 규스케(本間九介. 1869~1919). 이륙신보 특파원. 천우협과 흑룡회 회원.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대륙침략의 교두보로 하겠다는 목적으로 온 낭인(浪人). 1893 처음 조선 방문 후 수 차례 방문. 매약 행상을 하며 중부지방,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정탐. 청일전쟁 시 1894.7.27. 성환전투, 9.16 평양전투에도 참가하여 정탐 활동. 후일 통감부 및 총독부에서도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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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외교, 안보, 장래>

 조선은 썪은 달걀과 같아 부화력이 없다.

 

황실의 운이 다하여 이제 국가에서 사람을 세울 수 없음을 후회해도 이미 어쩔 수 없다. 아아, 조선의 금일은 이렇게 국맥이 끊어지려고 하여 남은 숨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적개의 뜻이 있는 자는 검을 빼서 일어날 때가 아닌가. 그런데도 한인은 너무도 무사태평하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에게 조선을 보여준다면, 4천년 폐허 흔적에 회고의 정을 느끼고 건필을 휘둘러 조선쇠망사를 쓰려고 했을 것이다. 한인은 소수의 우리 거류지인으로 변하여 우리 언어를 배우고, 거류지에서 장사하러 다닌다. 한인은 소수의 우리 거류지인에게 이길 수 없어, 상권을 우리에게 바친다. 아아, 망국민이 되지 말지어다.

 

청은 조선에 군림하여 항상 사대당을 돕고 진보당을 꺾어, 진보적인 의론을 하는 자가 있으면 사대당에게 사주해서 박멸시킨다. 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진보주의와 독립주의의 공기를 조선에 전파하는 것이다. 원세개가 경성에서 하는 거동도 오만하다. 우리나라는 조선에 대한 확고한 정책이 없다. 아아, 청 정부여, 청 정부여, 당신은 조선인의 무지몽매함을 좋아하는가. 그것을 좋아하는 것은 다만 조선을 취해서 자신의 속방으로 삼으려는 것 뿐이니 조선인들의 무지몽매함을 기뻐하는 것이 아닌가.

 

경성의 대도를 왕복하는데, 일본공사는 통상의 가마를 타고 겨우 순사 1명이 따라갈 뿐이다. 반면 청국의 흠차(원세개)는 말 위에서 유유히 안장에 앉아 앞뒤로 호위하는 기사 수 십 명을 데리고 간다.

 

정한의 역(임진왜란) 때 우리 병사가 난폭하게 약탈하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8도는 거의 초토화되었다. 그 사이 조선에 하나의 이로움을 준 것은 벼 모종을 이식하는 것 즉 모를 심는 기술을 가르쳐 준 것이다.

<주거, 여관>

육조거리에는 기와지붕이 줄지은 처마에 접해 있지만 건축은 볼만한 것이 없다. 처마가 찢겨져 달빛이 비치고, 마당이 황폐해져 참새가 운다.

 

의관은 정말 아름답다. 하지만 가옥은 게집과 제비집처럼 추하다. 거의 돼지우리라고 할만 하다.

 

여관겸 요리점인 주막 기둥에는 술상머리 술값을 아끼지 마라”(莫惜床頭沽酒錢)라고 써 있다. 안주는 명태, 돼지고기, 절인 야채(김치?) .

 

 여관에는 빈대, 모기, , 벼룩이 많아서 실내에서 잠을 잘 수가 없다. 빈대는 상충(床蟲)이고 한번 물면 일주일 동안 아프다. 여관은 우리나라 싸구려 여인숙에도 못 미친다. 천정에 메주를 매달아 두는 집은 냄새가 심해 두통이 날 때도 있다. 한 방에 수십 명이 묵는데 누운 자, 앉은 자, 잠자는 자, 깨어 있는 자, 방귀 뀌는 자, 이를 가는 자 등이 있다. 조선인은 담배를 좋아해서 실내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하다. 오히려 노숙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여관의 불결은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없다. 벽은 누런 색으로 닿으면 의복이 더러워지고, 지붕 밑에 진흙을 바른 천정은 낮아서 하품을 하면 목이 닿을 정도다. 앉아 있는 손님이 가래를 뱉을 때는, 앉아 있던 멍석을 들고 그 아래에 뱉고, 콧물이 떨어질 때는 손으로 비비고 바로 벽에 바른다. 어느 객사에도 목욕탕이 없는 것이 더욱 고통스럽다. 여름은 빈대와 모기가 매우 많아 지친 몸에도 잠자기 힘들고, 파리와 같은 것은 춘하추동 실내에서 날아다닌다. 경상, 전라, 충청, 경기 4도에서는 손님에게 콩밥을, 다른 4도에서는 조밥을 제공한다.

<의료, 불결, 질병>

조선의 불결은 유명하다. 경성 뿐 아니라 8도에 시가다운 시가가 없다. 우마의 인분은 주머니 안에 넘치고 그 불결함은 말로 할 수 없다. 시장 중앙에는 공동변소가 있지만 다만, 짚으로 지붕을 엮고 거적으로 사방을 두른 조잡한 곳이다. 그 분즙으로 개돼지를 길러, 기다렸다가 사람이 들어가면 인분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데에 이르면 거의 구토를 하게 된다. 음식물 불결도 특색이다. 썪은 생선과 야채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요리하는 것을 보면 어떠한 호걸이라도 수저 드는데 주저하게 된다. 삶고 볶은 것을 간 볼 때, 반드시 자기 손을 갖고 한다. 젓가락은 오랫동안 씻는 일이 없고, 콧물을 닦은 손으로 김치 항아리를 젓는 등 우리나라 사람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집에서 개를 기르는 것은 도둑을 경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먹기 위해서다. 조선의 개는 인분을 먹고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어린아이가 방안에 똥을 싸면 개를 불러 핥아먹게 한다. 다시 씻지도 않는다.

 

 여름에 야외로 나가면, 곳곳에 가마니로 벽을 만든 작은 집에 짚을 깔고, 수척한 사람이 고통스럽게 누워있는 것을 본다.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고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이다. 전염을 막기 위해 병에 걸린 사람을 야외의 작은 집에 옮겨 놓는다. 약을 주는 일은 없고 대개 버려서 죽이는 것과 같다.

 

어린아이와 천연두로 죽은 자는, 그 시신을 묻지 않고 가마니에 넣어 새끼로 가로 세로로 묶고, 이것을 야외의 나무에 매단다. 그렇게 하면 삼복의 더위에 시신이 부패하여 썪은 액체가 지상에 떨어지고, 악취가 끝없이 사방에 흩어져 코를 찌르게 된다.

 

중류 이상의 부인이 병에 걸리면 남자 의사에게 진찰 받는 일이 없다. 받더라도 얼굴을 뒤집어 쓰고 손을 내밀어 겨우 진맥을 보는 정도다. 불쌍한 조선의 부녀들이 중병에 걸리면 별 수 없이 죽어갈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문명이 날로 진보하여 의사에 뜻을 두어 학업을 마치고 졸업을 한 부녀가 매우 많다. 이들이 바다 건너 조선에서 이 불쌍한 부인들을 치료한다면, 그 공덕이 무량하고 이익도 매우 많이 볼 것이다.

 

조선이 우리나라와 통상하기 전에는 설탕이 없었다. 설탕을 조금 주면 아까워서 바로 먹지 않고 나중에 복통약으로 사용하는 자가 있다. 우스운 일이다.

<도로와 거리>

부산에서 육로로 경성 갈 때, 구포 거치는게 빠르다고 하여 구포에 도착해서 큰 길을 찾았지만, 한 갈래 작은 길 외에는 없다. 조선의 도로가 형편 없는데 몹시 놀랐다. 어떻게 이런 도로로 우차가 통행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마을 길보다도 심하게 울퉁불퉁하여 군대조차 1열로 가지 않으면 통행하기 어렵다. 경성-송도-서흥-봉산-황주-평양-의주 길은 나쁘지 않아서 대개 2열의 군대가 행군할 수 있다. 이 길은 사대의 결과로서 중국 사신의 왕래 길이라 좋게 만들었던 것이다.

 

엿장수는 엿판 메고 손에 든 가위를 째칵 째칵 거리며 엿이오, 엿이오소리 지르며 다닌다.

<하천, 산림>

내지의 강에는 대개 다리가 없고 배도 매우 드물다. 그래서 강을 만나면 나체로 헤엄쳐 건너간다.

 

하천은 평소 물이 적거나 완전히 마른 상태지만, 비가 조금이라도 내리면 홍수로 범람한다. 그래서 물가를 피해 경작하는게 보통이다. 제방사업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낙동강 삼각지 같은 곳이 그렇다. 매우 양지임에도 불구하고 호미 한 번 쓸 수 없다. 만약 견고한 제방을 쌓아 범람을 막는다면 매해 수확이 막대할 것이다. 한인들이 손 놓고 천연의 지형을 탓할 뿐인건 매우 어리석은 태도다. 제방사업이 아니라도 무슨 사업이든 공동으로 사업을 성사시키는 따위의 일은 바랄 수도 없다. 도로가 수리되지 않고 비위생적인 것도 공동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해외판로를 열려는 희망이 없고 상공업은 미발달 상태다.

 

산림은 개간되지 않고 함경도, 평안도 두 도에 약간의 소나무가 있는 산이 있을 뿐. 정원도 없다.

 

산은 대부분 민둥산으로 수목이 없으며 조금만 가물어도 수원이 마른다. 논밭이 갈라지고 벼 모종이 붉은 색으로 변하며 백성들이 고생하고 근심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높은 땅의 수전에 관개할 때 수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가뭄을 날 수 있지만, 조선에는 수차가 없어 물통으로 퍼올려야 한다.

<음식>

진미를 조금씩 맛보기보다는 맛이 없더라도 배부르게 먹기를 원한다. 한인은 우리가 반으로 만족하는 밥을 두 그릇이나 먹고서야 배부른 모양을 하는데 이것도 야만의 징후인가. 3(인천 부산 원산) 및 경성의 영사관에서 각국 사신을 초대하여 양식으로 연회할 때, 한인은 먹는 것에 욕심을 부려 다른 외국인들이 젓가락도 대기 전에 먼저 사양도 않고 먹어치워 손님들에게 폐를 끼친다.

 

생선국, 된장국 등에 모두 고춧가루를 넣는다. 매운 것을 좋아한다.

 

먹는다를 많이 쓴다 (식사, 물마시기, 흡연, 약복용, 장기나 도박, 뇌물, 아침밥 먹었습니까)

 

조선인은 참외, 수박을 좋아한다. 참외, 수박이 익었을 때는 쌀 시세가 떨어진다. 도로의 배설물에는 참외씨가 넘쳐 색이 파랗다.

<양반, 부패, 착취>

1만엔을 내면 관찰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관리가 인민을 괴롭히는 것이 사도(私盜)보다 심하다. 무엇 때문에 이들 관리를 죽이고 국가의 해를 제거할 것을 도모하지 않는가. 지금의 관리는 도적이 아닌 자가 없고, 가령 한 몸을 희생하여 관리 한 명을 죽여도 그 뒤를 계승하는 관리 역시 도적이 되는 것이다. 아아, 그들은 실로 불쌍하다. 천 명의 게슬러가 있어도 윌리엄 텔로 자임하는 한 사람이 있으면 관리가 어찌 그 욕심을 드러내겠는가.

 

우리나라에 화족(華族), 사족(士族), 평민(平民)의 구별이 있듯이 조선에도 양반(兩班)과 상한(常漢)의 구별이 있다. 양반은 과거를 거치면 어떠한 고등관도 살 수 있는 것이 조선의 제도이다. 지방관들 가운데 한문을 쓸 수 있는 자가 없는데 이르러서는 문장력이 없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도리어 주부(主簿), 이방(吏房) 등이 더 잘한다. 과거 시험장은 공공연한 수뢰 징집소가 되고 시험관은 공공연하게 수뢰 징집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가까이 있는 이웃나라에 아직도 노예제도가 행해지고 있다고 하면 누가 그것을 진실이라고 하겠는가. 조선에서는 중류 이상의 양반은 모두 하인이라는 자를 데리고 있다. 이들이 봉급을 받고 노예가 된 것은 아니다. 대부분 돈을 빌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맡기고 있다.

 

양반이 소일하는 모양은 실로 한가해 보인다. 일출부터 일몰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다만 담뱃대를 물고 방에 누워 있을 뿐이다. 그래도 재산가의 대부분은 양반족이다. 대개 관리가 되어 서민으로부터 난폭하게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큰 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지방관이 되는 것이다. 아아, 저들이 어찌 응보가 없기를 바라겠는가.

 

 초계(합천군)에서 객사에 묵을 때 관리가 와서 주인을 묶어 데리고 가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빌어도 관리는 한층 더 떠들었다. 객사 여주인이 2관문 정도 뇌물을 주자 이내 관리의 얼굴이 부드러워지더니 주인을 풀어 주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초계군수가 지나갈 때 답뱃대를 입에 물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병정 무뢰배는 품삯을 탐내 병정이 된다. 본래 간성(干城)의 분개가 있고 국가를 지키는 뜻이 있던 자가 아니다. 저 병사들이 항상 자랑하는 바는, ‘만약 전쟁이 나면 철포를 버리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어 적병에게 당할 걱정이 없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정부는 봉급을 주지 못할 때 저들 무리로 하여금 부자를 위협하게 하고 부잣집을 약탈하게 한다. 병사의 철포가 변해서 술 밑천이 된다.

 

뱃사공들은 다른 지방 여행객을 보면 무법의 뱃삯을 요구하여 왕왕 여행자를 분노케 한다. 상주 선착장에서 무법의 뱃삯을 요구하는 뱃사공에게 무법을 꾸짖어도 막무가내로 우기기에, 수영을 못하지만 짐짓 옷을 벗고 수영으로 건너가는 행동을 하니, 뱃사공은 두렵고 당황하여 일전도 받지 않고 태워 주었다. 허세가 통했다. 자못 우스운 일이다.

<인성, 나태>

돈 빌릴 때부터 갚을 마음이 없고, 갚을 때가 되면 변명하며 갚지 않는다. 그래도 창피함을 모른다.

 

작은 일로 싸움을 시작하면 입에 거품 물고 설전하다가 상투를 잡아당기고, 마지막에 옷이 찢어지는데 그러면 갓값 물어내라고 한다. 그 뿐 에도꼬(도쿄인) 같은 재빠른 싸움은 없다.

 

일본 목수가 반나절이면 할 일을 3~4일 걸려서 한다. 작업의 태평함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대개 비굴하고 구걸 근성이 있다.

 

비가 올 때는 한 사람도 밭에 나가 일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비가 내려 중요한 모심기 철을 놓쳐도 개의치 않는다.

 

김상용(金尙容)의 용기와 남이(南怡)의 기개는 다 어디로 갔나.

<형벌>

하나. 죄인을 땅위에 엎드리게 하고 떡갈나무로 만든 45,6, 두께 5푼 정도의 몽둥이로 살이 찢어져 뼈가 부서질 때까지 정강이를 친다. . 죄인의 궁둥이를 드러내 땅위에 엎드리게 하고 곤봉으로 친다. 채찍을 사용하기도 한다. . 죄인의 사지를 비틀고 그 관절을 빠지게 한다. . 목을 베는 죄라도 고귀한 사람은 약을 먹게 한다. 다섯. 손 또는 머리카락을 묶어 천정에 늘어뜨리고 그것을 친다.

<여성, 매춘, 빨래>

엄격한 남녀구별. 여자는 내실에 박혀 살고, 일이 없으면 형제라도 들어갈 수 없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서로 부인을 소개하는 일이 없다. 공자와 맹자가 지하에서 감복할만 하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간통, 강간이 성행한다. 간부(奸夫)가 여장하고 여자용 가마에 타고 내실에 들어가 여자 신발을 벗어두어 눈을 속이고 간통을 한다.

 

창기는 모두 처첩이고 자기 집에서 자기 처첩에게 몸을 팔게 한다. 돈만 주면 손님에게 시중 들게 한다. 완연한 밀매춘 소굴이다. 조선 창기만큼 매독이 많은 자가 세상에 없다.

 

8도 중 남색이 유행하지 않은 곳이 없다. ‘뼉 장사라고 하는데 남색상(男色商)이라는 뜻이다. 넓적다리를 뼉살이라고 한다.

 

가뭄이 계속되면 아녀자를 부자 혹은 중국인에게 팔아 하인을 만들어서 겨우 쌀과 보리를 구한다. 흉년과 기근 때문에 부잣집 문 앞에서 한 그릇의 밥을 구걸하는 모습. 찢어진 옷에 흐트러진 머리, 뺨에 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마른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지팡이에 의지하여 겨우 걷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을만큼 참담하다.

 

개울가에 나가 빨래하고, 물에 담군 옷을 평평한 돌 위에 놓고 막대기로 두들겨서 때를 없애고, 산자락에 말린다. 그 모양이 여름 더운 날에 아직도 눈이 남아있나하고 의심할 정도다. 이렇게 말린 후 집에 가지고 와 다듬이질을 한다. “장안 하늘에 한 조각 달, 집집마다 다듬이질 소리, 실로 끝없는 나그네의 회포를 당기는 다듬이질 소리.”

<교육, 훈련>

 조선의 무예 중 존재하는 것은 궁술 뿐이다. 칼과 창이 없지는 않지만 평일 그것을 연습하는 자는 없다.

 

무예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양반이 돈을 주고 임용을 받는다. 무관은 명칭에 불과하며 감히 병졸들을 이끌고 나라를 지키지도 못한다.

 

 서당에서 초학 아동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인륜의 대의와 조선사의 개략을 쓴 동몽선습의 일부와 천자문 한 책이다, 이것을 끝내면 통감절요’ 7책을 배운다. 아동의 학령은 대개 10세 내지 14~5세다. 아동이 서적을 외울 때는 몸을 좌우로 흔들어 그 모양이 마치 종이 호랑이와 같아 웃음을 사기에 족하다.

 

경성에는 책방이 2~3개 있다. 책방의 상태는 우리나라 히가게쵸(日影町)의 헌책방에 비교하면 아직 멀었다. 서적을 구하는 것이 불편하다. 조선사람이 문화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다. 스스로 무지몽매에 안주하니 불쌍하다.

<경제, 화폐, 인플레>

 내지 여행할 때 가장 불편한 것은 통화가 무거운 것이다.  1필에 겨우 20,  30엔 밖에 실을 수 없다. 그래서 내지의 상업은 물물교환의 옛날로 퇴보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인천에서 한 근에 80엔 하는 백로 깃이 공주에서는 100엔까지 등귀한다. 그런데도 수요가 매우 많다.

 

 조선을 여행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약품을 지고 의사 또는 약상이라고 하며, 병을 진찰하고 약을 팔아 돈을 벌어서 다닌다. 엽전이 너무 무거워 천리를 다닐 때 휴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사람들에게 일본지폐를 보여주니 맹인이 코끼리를 평하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통화라니 우리를 속이는 것이냐하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가벼우니 도적을 만나면 많이 뺏길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이것으로 엽전을 바꾸어 안에 넣어두고 밖으로 빈 것처럼 하면, 관리가 빼앗아 갈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관리가 재물을 빼앗아가는 것이 이 나라의 통폐이다.). 가만히 생각하고 있던 어떤 사람은 지폐는 매우 편리한 것이다. 이 지폐를 사용하는 자는 정부에 얼마의 세금을 내느냐고 조용히 묻는다. 예전에는 당오전 1매로 엽전 5매를 바꾸었는데 지금은 1:1로 교환한다. 당오전은 이름은 있어도 가치는 없다.

 

경성 영국영사관의 고용인 최 모는 영국인이 담배피우는 것이 하루에 50냥인데, 50냥이면 일가 몇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밑천이다. 그 교만과 사치 때문에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50냥은 우리나라 돈 150전인데 교만과 사치의 극치라니. 이런 우물 안의 어리석은 개구리를 일소에 붙일 것인가.

<유교, 불교>

조선사람이 숭배하는 유교를 보면 이것 역시 이름 뿐이다. 각 군, 각 현에 공자묘를 세워 때로 석전(釋奠)의 예를 행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촌부자는 스스로 유자라고 칭하고 아동에게 논어, 맹자를 가르치지지만, 학문의 깊이가 얕아서 겨우 주자의 집주(集註)를 금과옥조로 새기고 퇴계, 율곡 두 사람을 숭앙하여, 고금인이 서로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는데 그치고 있다. 주자 이외에는 중요한 것을 내놓지 못하고, 주자 이외에 영웅호걸의 유자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가 없다. 그들이 숭상하는 바는 유교지만 그 표상은 허례를 일삼는 것이고, 실체인 도덕의 원천을 연구하는 바가 없다. 그래서 큰 선비가 한 사람도 없고 박식한 사람도 없다.

 

승려는 머리카락을 기르지 않으므로 우리나라와 다르지 않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음주는 허락되어 있다. 시를 짓고 글을 초하는 것을 잘 하는 자는 있어도 불교 경전에 밝은 자는 없다. 좌선당(坐禪堂)은 노승이 잠을 탐하는 방에 지나지 않는다. 승려가 학문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 아아, 불교가 떨치지 못하는 까닭은 법에 있지 않고 승려에게 있다. 조선의 승려는 장엄하게 우러를 수가 없다. 어찌 부처의 교법을 전하여 중생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문화, 제도, 유물, 언어, 풍습>

상소할 때는 왕궁 문 앞에서 상 위에 상소장을 두고 밤낮으로 돗자리를 깔고 앉아 수리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동학당 당수 최모(최제우)의 원통한 죽음을 호소할 때도 그랬다.

 

조선인들은 우리나라 여자가 다홍치마를 바람에 날리며 하얀 정강이를 드러내는 것을 보고 웃는다. 우리나라 사람은 조선의 부녀가 유방을 드러내고 걷는 것을 보고 웃는다.

 

연극이나 만담 등이 없다. 줄타기만 있다.

 

토지소유대장이라는게 없다. 그래서 매매할 때 등기등록의 번거로움이 없어 간편하다고 한다.

 

8도 중 가장 언어가 좋은 곳은 충청도 충주다. 말의 격이 정돈되어 있고 어조가 온아(溫雅)하다.

 

이같이 교묘한 문자(언문)가 있는데, 왜 일상의 서간문까지 어려운 한문을 사용하나. 이해할 수 없다.

 

가장 기이한 풍속은 조혼. 신랑은 보통 12~3, 신부는 20세 전후.

 

문물, 제도, 기계, 공예는 하나같이 시선을 끌만한 것이 없다. 아프리카 내지 여행을 연상시킨다.

 

미술품은 하나도 감복할만한 게 없다. 말꼬리로 삿갓이나 관을 짜는 것을 보면 손끝이 여문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기교를 다른 것으로 바꾸면 조선의 미술이 어찌 지금과 같겠는가.

 

골동품 가운데 귀하다고 할만한 것이 매우 적다. 조선사람은 평소부터 고고(考古)의 재료로 보존하는 것이 없다. 또 풍아한 마음이 있어 보관하고 있는 것도 없다. 다만 헛되이 광주리 속에 넣어 좀의 해를 피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이 서화 골동품에 뜻이 있으면 조선에 가서 그들의 광주리 속을 찾아보면 묘미가 있을 것이다.

 

안국동은 골동품 가게가 많다. 그래도 볼만한 것이 적다. 또 절반은 우리나라 제조품이다.

 

지나(支那)를 항상 중화로, 스스로를 소화라고 부른다. ‘나는 대화(大華) 사람이다라고 하면 오만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만하여 자랑하는 것과 비루하여 주눅든 것 중 어느게 낫나. 그렇다면 왜 소화라고 하나, 하고 책망하면 한 마디도 못한다.

 

우국지사를 발견했나 했더니... (청주 최 모와의 대화)

: 내가 지금 겨우 아동 가르치는 것으로 입에 풀칠하고 있다. 언제 날개를 펼칠지 기약이 없다. 공이 나를 일본으로 데리고 가 달라. 유능한 인사들과 만나 고답을 접하여 재학을 기른 후에 서서히 도모하기를 바란다.

 

혼마 : (인재를 찾았다고 기뻐하면서 테스트) 공은 지금 조선이 태평하다고 생각하나?

 

: 내가 묘당(의정부)에서 군자의 재주를 펼 땅이 없어 태평이라고 할 수 없다.

 

혼마 : 나라가 쇠운에 처하니 우국지사는 그 힘을 다해야 하는 때다. 국세를 펴서 조정의 기강을 바로 하기 위해 어떤 대책을 취할 것인가?

 

: 그 자리에 있지 않으므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불초 천학이 어찌 공의 앞에서 말할 수 있겠나?

 

혼마 : (다른 사람의 이목이 두려워 함구하는 것으로 생각. 몇 차례 필담 끝에 최의 진심을 파악. 최의 진심은...)

 

: 지금은 집안의 이름이 떨어져 아무도 몰라 주지만, 10세대 이전에는 영의정을 3대나 지냈다. 부친과 조부 생각을 할 때마다 피눈물이 난다. 일찍이 신명께 맹세했다. 살아서 집안의 이름을 드날릴 수 없다면 죽어서 제사도 지내지 못하는 귀신이 될 뿐이라고. 이것이 나의 뜻과 절개이다. 공이 나를 당신 나라로 데려가, 후에 내가 그곳에서 뜻을 얻어 큰 집과 높은 누각에서 일어나서 눕고, 구정(九鼎. 우왕 때 주조한 큰 솥)에 포식할 수 있게 된다면, 이것은 모두 공의 선물이 아니겠나.

 

혼마 : (아아, 나는 그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했구나. 그는 나라를 근심하는 사람이 아니고 집안을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국운이 급하고 위태로운데 단지 집안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자. 한인은 모두 이러하다. 조선은 드디어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게 되었다. ‘나는 혼자 이방의 손님으로서 사뭇 소매를 적신다.’(남송의 시인 육유의 우국시 구절). 애석하다. 우물 바닥에 앉아 하늘이 큰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동학당 두령 서병학(徐丙鶴)과의 대화 : 황해도 서흥 객사에서 노새를 타고 들어온 2~3명의 여행객을 만나 대화

: 공은 이웃나라 선비이므로 틀림없이 사적에 풍부할 것이다. 알지 못하는 귀국의 인사가 왜 정한의 역’(임진왜란) 일을 가지고 조선을 적대시하고 있나?

 

혼마 : (임진왜란은 일본이 대승한 전쟁인데, 일본인이 대패했던 조선인을 적대시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당시 8도의 초목이 모두 일본군에게 유린되었다. 일본이 이겼는데 금일에까지 한을 품은 자가 있겠나?

 

: (일본 대승이었다는 말에 전라, 경상도 전황을 상세히 설명한 뒤) 일본이 역사를 꺼려해서 사실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이 잘못 알고 있는거다.

 

혼마 :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가 파죽지세로 경상도, 충청도를 지나 경성에 들어간 전말을 설명하고) 사실을 제대로 알자. 귀국이 이겼다면 어찌 일본이 무인지경 같이 8도를 유린할 수 있었겠나? 어찌 두 왕자를 사로잡을 수 있었겠나? 귀국은 왜 명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했겠나?

 

: (얼굴이 빨개지더니) 그게 진실이라면 공도 적국 사람 아닌가?

 

혼마 : (서병학 일행이 적개심과 강개한 뜻을 가지고 있으며 보통의 한인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이웃나라와의 교제에서는 화해하는 것도 싸우는 것도 일상이다. 어찌 임진의 일을 가지고 귀국을 적대시할 필요가 있겠나. 귀국은 원나라가 노략질할 때 원나라를 인도하지 않았나? 일찍이 우리 쓰시마를 모두 죽이려고도 하지 않았나? 그러나 이런 일은 모두 과거일 뿐 다시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구구한 지난 날의 자취를 가지고 (현재의) 동아시아 만년의 대책을 잘못하는 것은 도리에 밝은게 아니다. 귀국의 정책을 보면 도랑을 깨끗하게 하거나 성보를 높이지 않으면서, 오늘은 청에 의지하고 내일은 러시아에 의지하려고 한다. 아아, 러시아와 청 두 나라가 귀국의 문명을 조장하고 병비를 튼튼하게 하며 부강하게 만들어준 적이 있나? 이렇게 의지할 수 없는데에 의지하면 수년을 지나 귀국은 그들에게 먹힐 것이다.

 

: 조선은 청국과 재혼한 신부일 뿐이다. 일찍이 조선이 명()에 조공을 바치고, ()이라고 칭하고 신()이라고 부른 이래, 명조가 조선을 대하는 것이 자상한 어머니가 아들에게 하는 것과 같았다. 편안함과 근심을 함께 한 그 은혜의 높고 깊음은 태산 발해도 미칠 수 없다. 애석하다, 대명(大明)이 끝내 청()의 손바닥에 돌아갔다. 우리가 의병으로 그들에게 간다고 해도 중과부적인데 어찌하랴. 병자호란 때의 큰 패배에 한을 삼키고 그들에게 정삭을 바치는 것이 즐거워서 하는 것이겠나? (正朔 - 정월 초하루. 왕조가 바뀔 때면 정삭을 달리 함). 마치 장부가 그 남편을 잃고 개가하는 것과 같을 뿐이니, 꿈꾸는 동안이나 눈 깜짝할 사이에도 어찌 숭정(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두 글자를 잊겠는가. 오히려 귀국은 (진나라 신하) ‘서복의 후예인데, 왜 서양국의 신하가 되어 그 정삭을 받들고 누린내가 나는 것을 배우는가?

 

혼마 : (이들이 스스로 대장부가 되지 못하고, 사대를 국시로 생각하고, 청국에 대해서는 재가한 부인이라고 하고, 일본이 진나라 후예라고 생각하고, 명치유신 이래 법률, 의복이 바뀐 것을 서양의 속국이라고 단정하자 불쌍하게 생각.)

 

: 조선이 지금 비록 청국의 정삭을 봉했다고 해도, 의관은 명나라의 옛 제도에서 변한 것이 없다. (다음 날 헤어질 때 편지에 경상도 상주 거주 서병학, 문경읍내 박인병이라는 글을 써줌)

 

혼마 : (숭정을 말하는걸 보고, 이들이 사대의 폐습에 절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애석하게 생각. 나중에 동학당이 봉기하고 나서 서병학이 충청도 보은에 의거한 동학당의 수령이었음을 알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