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203100041
[편집자 주]
‘5공(共) 정권의 설계자’로 불리는 허화평이 10·26과 12·12를 고백했다. 격동기의 굵직한 현대사를 몇 차례 언급하긴 했으나 이처럼 통째로 ‘까놓은’ 적은 없었다. 《월간조선》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의 인연에서 시작해 5공 출범 비화까지 흥미진진한 체험담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글의 성격상 그의 일방적 주장이 상당히 포함돼 있음을 밝힌다.
⊙ 박 대통령, ‘파격 인사’로 40대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한 것이 5공의 주춧돌
⊙ 군(軍) 인맥을 따지면, 서종철-노재현-박희동-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끈끈한 인간관계
⊙ 10·26은 김재규·정승화·김계원에 의한 전형적인 ‘궁정(宮廷) 쿠데타’
⊙ 정승화 참모총장은 김재규의 ‘인질’처럼 행동해
⊙ 12·12 병력충돌은 장태완 장군의 공격에 맞서기 위한 자구책
許和平
⊙ 現 미래한국재단 이사장.
⊙ 74세. 육군사관학교(17기) 졸업. 9사단 대대장 및 작전참모,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육군 준장 예편.
⊙ 대통령 비서실 보좌관·정무수석, 미국 헤리티지(Heritage) 재단 수석연구원, 14·15대 국회의원 역임.
⊙ 저서: 《가장 근원적인 것에 대하여》, 《이념은 날개가 아니다》, 《지도력의 위기》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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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간 것은 1979년 3월이다. 몇 달 뒤 10·26과 12·12, 이듬해 5·18을 거치며 나는 파란 많은 한국 현대사의 영욕(榮辱)을 모두 경험했다. 이후 대통령 정무수석으로 제5공화국의 기틀을 닦았으나 16년이 지난 뒤 ‘5·18특별법’으로 법정에 서야 했다.
한때 권력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당대 군인의 자리에서 임무를 수행했던 나는 부득이 ‘죄인(罪人)’이 되었다. 바로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을 통해서 말이다. 나는 그 재판을 현대사의 대표적인 ‘정치 재판’이라 생각한다. 12·12는 ‘군사반란’으로, 5·18은 ‘내란목적살인’으로 역사는 뒤집혔다.
5공 주역들은 훈장, 연금을 몰수당했고 온갖 수모와 시련을 견뎌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분들이 세상을 떠났다. 또 반대편에 섰던 정승화(鄭昇和), 장태완(張泰玩) 장군도 떠났다.
나는 생각한다. 비록 ‘정치 재판’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역사적 평가마저 재판의 결과와 같다고는 믿지 않는다. 적어도 훗날 제대로 된 역사적 기술이 이뤄지리라 확신한다.
1970년대와 80년대 국가를 지키고자 했던 군인세력과 민주화를 부르짖었던 정치세력 간의 일대 충돌이 있었다. 뒤돌아보면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일지 모른다. 이 시점에서 나는 승자와 패자의 개념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당시 역사를 재조명하고 싶다. 이미 단죄를 받은 나는 원한도 미련도 없다. 다만, 역사적 화해의 실마리를 찾고 싶을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10·26과 12·12, 그리고 5·18에 대해 말을 아껴왔다. 그러고 보니, 5공 사람인 내가 무슨 말을 해도 “탈권(奪權)을 위해, 권력을 잡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사람들은 말할지 모른다. 그렇다 해도, 내가 체험하고 느꼈던 현대사를 모른 척 눈감을 수는 없다. 지금은 말할 때라고 느낀다.
옛말에 ‘당대(當代) 역사는 30년이 지난 후에 서술하라’는 말이 있다. 벌써 햇수로 33년이 지났다. 그러나 나에게 10·26과 12·12는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는 ‘현장’이다.
◆ 全統과 朴統의 오랜 인연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장군에게 대장 계급장을 달아주고 있다. 전 장군은 대장으로 예편, 11대 대통령이 되었다.
10·26과 12·12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9년 전두환(全斗煥) 장군이 마흔여덟 나이에 국군보안사령관이 된 배경을 먼저 알아야 한다. 또 전 대통령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질기고 오래된 인연에 주목해야 한다.
박 대통령과 육사 2기 동기인 이규동(李圭東) 장군이 육군사관학교 참모장을 할 때의 일이다. 육사는 6·25전쟁으로 잠시 문을 닫았다가 1951년 4년제 정규 사관학교로 경남 진해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이때 들어온 생도가 육사 11기다.
전두환 생도는 축구부 부장으로 활약했고, 육해공 3군 사관학교 체육대회를 꾸려가는 책임자가 이규동 참모장이었다. 이 참모장은 생도들의 운동을 지켜보다가 축구부장인 전두환 생도를 눈여겨봤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이규동의 사위가 됐다.
전두환 생도가 임관한 뒤 장인의 호출을 받고 서울 영등포에 있던 ‘6관구 사령부’를 찾았다. 그때 사령관이 박정희 장군이었다. 이규동 장군이 사위를 박 장군에게 인사시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전두환 중위를 보자 박 장군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자네, 내 전속부관을 하게.”
뜻밖의 얘기여서 전 중위는 “저는 전속부관 할 체질이 못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 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이것이 두 사람의 첫 인연이었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뒤 육사 생도들이 혁명 지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당시 생도들의 시가행진은 군사혁명에 힘을 실어주는 분수령이 됐다. 젊은 예비장교들의 지지는 무능과 부패에 지친 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때 전두환 대위는 후배 육사 생도들을 동원하는 데 가장 앞장섰다.
그 인연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민원 비서관이 되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얼마 뒤 육군고등군사반(OAC) 입교 명령이 떨어졌다. 보통 대위 이상 장교는 전남 광주에 있는 OAC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짐을 꾸린 뒤 박정희 의장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자네, 전역(轉役)부터 하게나.”
“네? 각하, 뭐라고 하셨습니까.”
“전역해서 공화당에 들어가 정치를 하게.”
“네?… 각하, 저는 정치를 모릅니다. 정치를 생각해 본 일도 없고, 저와 안 맞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가려고 하는데 자네는 왜 안 가려 하나.”
“정치는 어렵고 육군 대위인데 돈도 없고… 조건도 안 맞고… 여러 형편상 제게 안 맞는 것 같습니다.”
“도와줄 테니 해보게.”
박 의장이 자꾸 권유하자, 전 대위는 변명이 궁해졌다.
“그럼, 가족하고 의논해 보겠습니다.”
박 의장이 버럭 화를 냈다.
“자네는 자네 문제를 가족에게 허가를 받아야 하나?”
혼이 나 쫓겨나다시피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렇다고 정치 입문 제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고 한다. 다음 날, 출근했더니 의장 비서실장이 그를 불렀다. 완전히 기가 죽어 의장실에 들어섰다.
“저는 아무래도 군에 남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뜻밖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알았네.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군대생활 잘 하게나.”
이것이 박 대통령과의 두 번째 인연이었다.
◆ 전두환, 청와대로
민정 이양 직후인 1963년, 소령으로 진급한 전두환은 육군대학 졸업 직후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갔다. 박 대통령과의 세 번째 만남이었다. 때마침 그 자리에 김재춘(金在春·육사 5기) 중앙정보부장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김 부장에게 “전 소령을 데려가 일 좀 시키시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로 가게 됐으나 중정과의 인연은 1년 남짓이었다.
육군 중령으로 진급한 뒤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을 거쳐 수경사 30경비대대장 발령이 났다. 30경비대대는 청와대 내곽(內廓)을 경계하는 부대였다. 전임자는 육사 11기 동기였던 손영길 중령. 손 중령은 박 대통령이 사단장으로 있을 때 전속부관을 한 인물이다. 그 후임 자리에 전두환 중령을 앉힌 것이다.
전두환 30대대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81mm 박격포를 청와대 뒤쪽 북악산을 향해 배치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포신이 청와대를 향한다는 점이었다. 전 중령 생각은 이러했다.
만약 북악산 일대에 간첩이 나타나면 먼저 박격포로 조명탄을 쏘아 주위를 대낮처럼 밝혀야 작전을 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통 보병대대는 3개 소총중대와 1개 화기중대로 편성하는데, 당시 30경비대대는 박격포를 창고에 처박아두고 있는 상태였다.
전두환 대대장은 수경사령관이었던 최우근(崔宇根·육사 3기) 장군을 찾아가 박격포를 설치하겠다고 보고했다. 최 사령관은 신중한 반응이었다고 한다. “대통령에게 큰 결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전 대대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박종규(朴鐘圭) 청와대 경호실장을 찾아갔다.
“박 대통령이 포병 출신이시니 이해하실 겁니다. 81mm포를 배치해 비상시 조명탄을 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박 대통령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때부터 전 대대장은 매일 30경비대대에 비상을 걸어 박격포 발사훈련을 시켰다. 부대원들로서는 죽을 노릇이었다고 한다.
“상황이 발생하면 자다가도 일어나 조명탄부터 쏴라.”
이것이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에도 지켜야 할 전두환 대대장의 수칙이었다.
얼마 뒤, 그러니까 1968년 1월 김신조가 무장공비를 이끌고 침투했다. 당시 전군에 비상이 걸렸고 일주일 동안 수도권 일대를 수색했지만 공비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군 당국은 무장공비들이 퇴각한 것으로 판단, 비상을 해제했다. 수경사령관도 예정했던 해외 출장을 떠났다.
1월 21일 전두환 대대장도 모처럼 일찍 귀가했지만, 이내 매일 영내(營內) 대기하며 고생한 부대원들이 생각나 술과 안주를 챙겨 다시 부대로 갔다고 한다. 대대장실로 부하들을 불러 술잔을 돌리려는데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자하문(紫霞門) 초소 부근에서 벌어진 종로 경찰서장인 최규식 경무관과 김신조 공비 간의 총격전이었다.
총소리가 나자마자, 81mm포 사수들이 훈련받은 대로 조명탄부터 쏘았다. 북악산 하늘이 훤하게 밝아졌다. 그 조명탄 중 불량탄 하나가 김신조 앞에 떨어졌다. 포탄을 본 공비들이 혼비백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날 30경비대대는 현장에서 5명을 사살했고 31일까지 군경합동 수색을 펴 28명을 사살하고 김신조를 생포했다.
만약 박격포를 쏘지 않았다면, 불량탄이 김신조 앞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무장공비들에 의해 청와대가 쉽게 뚫렸을지 모른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사건 직후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직접 전 대대장에게 감사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전화는 없었다고 한다.
‘1·21 사태’가 잊힐 무렵 박 대통령이 30경비대대를 깜짝 방문했다.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녘, 전 대대장과 부대원들이 웃통을 벗고 연병장을 뛰고 있는 모습을 본 박 대통령은 “자네들 목욕시설 한번 보자”고 말했다고 한다. 둘러본 뒤 “형편없구먼”이라면서 “목욕시설과 경비대대 건물을 내가 손봐줄게”라고 말했다고 한다.
◆ 월남을 거쳐 다시 청와대로
전두환은 이후 서종철(徐鐘喆·육사 1기) 육군참모총장의 수석부관으로 근무하다 1970년 주(駐)월남 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복무했다. 그때 박 대통령이 전두환 대령에게 위문편지를 보냈다. 전 대령이 내게 그 편지를 보여준 일이 있다. 세로로 쓴 편지에는 전 대령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만큼 박 대통령은 그를 스스럼없이 아꼈다.
월남에서 돌아온 전 대령은 1971년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됐고 그곳에서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러고 얼마 뒤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령을 받았다. 차지철(車智澈)이 경호실장을 할 무렵이었다. 작전차장보는 경호실장 밑에서 경호임무 작전을 지휘하는 실질적 책임자로 대통령과 가족을 보호하는 자리다. 이 과정에서 박 대통령 가족과 남다른 관계를 형성했을 것이다.
1978년 전두환 소장은 1사단장으로 갔다. 당시 나는 9사단 작전참모를 할 때였는데, 전방에서 북한 땅굴이 발견돼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돼 있었다. 사단마다 땅굴 찾기에 혈안이었고 9사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임 1사단장은 땅굴을 찾지 못했지만, 전두환 소장이 부임하자마자 땅굴이 발견됐다.
사실 ‘땅굴’은 박정희 정권에 엄청난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한미관계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고 자주국방, 핵개발, 인권문제를 두고 박정희 정권은 수세(守勢) 위치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땅굴이 발견된 것이다. 박 대통령으로선 전두환 사단장이 미덥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40대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취임
그러나 국내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1978년 12월 총선에서 공화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득표율은 야당인 신민당에 못 미쳤다. 그러자 반(反)유신 세력이 서서히 공세를 높였고 경제적으로도 오일쇼크 이후 외채 부담이 가중됐다. 유가폭등에다 부가세 도입으로 중소상인들의 불만이 커져 갔다.
이 와중에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金載圭·육사 2기) 중앙정보부장, 진종채(陳鍾埰·육사 8기) 보안사령관 등 권력기관은 심각한 갈등상태에 놓여 있었다. 진종채 장군이 이끄는 보안사는 완전히 김재규의 중정에 눌려 제 기능을 발휘 못 하고 있었고, 차지철은 박 대통령을 끼고 김재규와 다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종채 장군이 2군사령관으로 나가면서,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전두환 소장이 후임 보안사령관이 된 것이다. 통상 사단장과 군단장을 마친 고참들이 가는 자리에 새파란 40대 소장이 들어온 것이다.
이 인사에는 당시 노재현(盧載鉉·육사 3기) 국방장관의 노력이 보태졌다고 한다. 노재현 장관과 전두환 장군은 이미 이런저런 인연이 두터운 사이다. 그러니까 1969년 서종철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을 할 무렵 전두환 대령은 총장실 수석부관이었다. 참모차장이 바로 노 장관. 총장실과 차장실이 붙어 있어 매일 만나는 사이였다. 당시 군 인맥으로 따지자면, 서종철-노재현-박희동(朴熙東·육사 3기)-전두환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끈끈하게 이어졌다고 할까.
여기서 잠깐. 박정희 대통령의 군 인사 스타일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은 혁명 후 정치인의 군 인사개입을 철저히 차단했고 심지어 미국의 입김도 막았다. 군 통수권자(대통령)의 고유 인사권한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특히 총장이나 주요 지휘관, 보안사령관 자리는 누가 박 대통령에게 인사를 건의하면, 될 인사도 안 됐다.
그러나 노재현 장관이 ‘전례를 깨고’ 보안사령관 자리에 전두환 장군을 천거했고 박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 10·26 반년쯤 앞두고 보안사 근무 시작
노재현 장관은 나아가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박희동 3군사령관을 천거했다. 노 장관과 박 사령관은 포병과 보병으로 병과는 다르지만 같은 육사 3기에다 소위 ‘절친’이었다.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과 박 대통령은 포병 출신이다.
노 장관은 박 대통령에게 “육사 2기인 이세호(李世鎬) 총장 후임에 육사 3기가 가는 게 맞다”고 설득했다. 내심 박희동 사령관을 민 것이다.
그러자 김재규 중정부장이 반대하고 나섰다. 김 부장은 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각하. 육사 2기 후임에 3기가 가는 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미 3기 출신인 노재현 장관이 참모총장을 하지 않았습니까. 세대교체가 필요합니다.”
김재규는 내심 정승화를 밀고 있었지만 그를 꼭 집어 얘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총장 자리가 육사 5기로 넘어갔다. 4기는 1948년 여수·순천 반란 사건 후 숙군의 영향으로 힘을 못 쓰는 상황이었다.
육사 5기인 정승화 장군은 당시 1군사령관이었다. 경북 금릉(김천) 출신의 정승화는 육사 교장 시절, 생도였던 박지만(朴志晩)을 통해 청와대와 자주 접촉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박 대통령 고향(구미)과 가까웠고, 능력 면에서도 ‘작전통’으로 인정받던 사람이었다. 어쨌든 정승화 장군이 총장이 된 배경에는 김재규 부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79년 전두환 장군이 보안사령관이 된 뒤 나는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나는 육군 중위 때, 그러니까 전두환 대통령이 소령이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그분은 나를 좋아했고 격려도 많이 받았다. 우리는 군대를 사랑했으니까. 그러나 직접 그분 밑에서 복무한 적은 없었다. 육사 14기 이종구(李鍾九), 16기 장세동(張世東), 내 동기인 17기 안현태(安賢泰)·김진영(金振永) 장군은 전두환 장군 밑에서 근무한 일이 있으나 나는 그런 인연이 없었다.
이희성(李熺性·육사 8기) 장군이 1군단장으로 있을 때 나는 9사단 작전참모였다. 그러다 이 장군이 ‘특명검열단장’으로 가면서 “향후 참모장이나 연대장으로 나가기 전에 같이 근무를 하자”고 해 특검단으로 갔다. 수도권 방위에 대한 전력태세를 연구하는 일이 내 업무과제였다.
어느 날 전두환 사령관이 내게 “같이 일할 수 없겠느냐”고 물어왔다. 1979년 3월로 기억한다. 나는 그 자리가 중요한 자리고, 과거 보안사 근무 경험도 있어서 동의했다. 거기서 내 운명과 한국현대사의 운명을 뒤바꾼 10·26과 12·12를 맞았다.
◆ 정승화, 김재규의 ‘인질’처럼?
10·26 당시 보안사 합동수사본부가 파악한, 그리고 내가 온 몸으로 진실이라 믿는 상황은 이렇다.
10·26은 전형적인 궁정(宮廷) 쿠데타다. 권력 핵심부에서 소수 사람이 담합해 절대 권력자를 무너뜨리려 한 사건이다.
그런 음모는 소수가 참여할수록 좋다. 청와대 1인자인 비서실장(김계원)과 정보최고책임자(김재규), 육군 최고지휘자(정승화)를 포함한 3인방이 배짱만 같고, 뜻만 같으면 쿠데타가 가능하다. 이게 우연의 일치일까. 세 사람은 특별한 인간관계를 쌓았고 고향도 비슷했다. 모두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사람이란 공통점도 있었다.
역사는 김재규만 처벌했지만 정승화와 김계원에 대한 나의 의심은 33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역사적 승패의 개념을 떠나 실체적 진실을 찾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먼저 정승화 당시 육참총장에 대한 의심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빠져나갈 수 없는 공범 혐의자다. 김재규는 주범이었고, 또한 정승화의 배후인물이었다.
정승화 총장은 그날 궁정동의 정보부장 집무실 내 식당에서 김정섭 중정 차장보와 식사를 하다가 총성을 들었다.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는 총성이었다. 모두 40여 발이 울렸다. 곧이어 정승화는 맨발의 김재규와 함께 김재규의 경호원이 모는 승용차를 타고 육군본부 벙커로 향했다.
당시 정승화는 육군 최고 지휘관으로 대통령 유고(有故) 시 계엄사령관이자 군최고책임자였다. 그런 그가 시해현장 확인도 없이 이탈했고, 자신의 차량을 버리고 김재규 차를 타고, 김재규가 요구하는 대로 행동했다. 김재규가 체포될 때까지. 자기 행적은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정승화는 김재규의 ‘인질’처럼 육본으로 간 것이다.
그런데도 정승화는 나중 이렇게 말했다.
“자하문 외곽 지역에서 5발 정도의 단연발 총소리를 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만찬장소가 궁정동 안가가 아니라 청와대 본관인 줄 알았다.”
당시 청와대 주변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채 50m도 안 되는 안가에서 40여 발의 총성이 울렸고, 박 대통령과의 만찬 도중 김재규가 잠시 다녀갔는데도 안가가 아니라 본관에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묻고 싶다. 김재규가 박 대통령 옆에서 식사한 사실도 알고 있었고, 시해 후 피가 낭자한 와이셔츠, 넥타이마저 풀어헤친 상태에서 헐레벌떡 찾아온 김재규를 따라간 행동이 과연 옳은가?
최소한 “웬 피냐?”고, “현장에 가보자”고 말했어야 옳다. 일절 그런 행동 없이 현장을 벗어나 육본으로 향했다. 정승화는 김재규의 차 안에서, 김재규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후 가위표를 하자 그제야 유고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육본에 도착해서도 이재전(李在田·육사 8기) 경호실 차장에게 전화해 “이상이 없나?”고 물은 뒤 “병력을 움직이지 말라”고 지시했다. 또 전성각(全成珏·육사 8기) 수도경비사령관이 육본 벙커에 도착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 부대는 이상이 없나?”
그런 뒤 수경사 병력으로 청와대를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비상상황에서도 수경사는 대통령 경호실이 통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차지철이 없다면 김계원 비서실장이 이재전 경호실 차장을 통해 수경사령관에게 지시해야 옳다. 이것은 정승화의 월권이다.
대통령이 돌아가시면 경호실이 총출동해 범인을 잡고, 대통령 시신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도 “너희, 꼼짝하지 말라”고 이야기한 셈이다.
◆ 정승화의 월권
10·26 당일 김재규와 정승화는 육본에 도착해 군 수뇌부를 불러 계엄선포와 병력동원을 준비했다. 이 역시 결정적 월권이다. 정상적이라면 육군참모총장이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보고하고, 장관이 군 수뇌부를 불러야 한다. 그런데 총장이 불렀다. 그리고 노 장관도 육본으로 오라고 했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이다.
그러면서 20사단을 육사에 배치하고, 9공수여단을 육본으로 오도록 지시를 했다. 수경사를 향해 “내 말 듣고 출동 준비하라”고 명령한 것도 정승화다. 또 이건영 3군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부엉이 둘(2)을 발령하고, 제20, 30, 33사단은 출동준비를 시켜두라”고 명령했다. ‘부엉이 둘’은 정규전에 대비한 2급 비상사태를 대비하는 조치다. 다시 말해 김재규가 필요한 부대 출동 준비를 지시한 것이다.
정승화는 또 김재규에게 “병력이 출동하면 어디를 경비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곁에 있던 김정섭 정보부 2차장보가 “방송국, 발전소 등에 부대를 배치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런데 이 말을 재판 과정에서 부인했다. 합수부 수사에서는 얘기했지만 ‘5·18 특별법’으로 재판을 할 때는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김재규의 진술이 있었고, 김정섭 차장보의 진술도 일치한다. 정승화 본인이 번복한다고 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 “김재규를 정중하게 잘 모셔라”
1979년 12월 12일 밤 박 대통령 시해사건을 수사 중인 합동수사본부 측이 정승화 육참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 전방의 군 부대가 서울로 출동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사실은 당시 국무위원들이 알 수 없었다. “다쳤는지, 병이 났는지” 의심스러웠지만 김재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신현확(申鉉碻) 당시 부총리와 김성진(金聖鎭) 문공부장관이 따로 김계원 비서실장을 불러 추궁한 뒤에야 “각하께서 운명하셨다”는 답을 들었다.
김계원이 노재현 장관에게 “김재규가 범인”이라 말하자, 노 장관은 정승화와 전두환을 급히 불렀다. 노 장관은 전두환 사령관에게 “정 총장의 도움을 받아서 김재규를 연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정승화가 전두환 사령관에게 뭐라고 지시했느냐가 중요하다. 정승화는 이렇게 말했다.
“김재규를 보안사 안가로 데려가 정중하게 잘 모셔라.”
나중 정승화는 “내가 김재규 체포를 지시했고, 그런 말(잘 모셔라)을 한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내가 증인이다. 당시 전두환 사령관이 비서실장인 내게 “김재규를 정동 안가에 잘 모셔라”고 지시했다. “잘 모셔라”는 정승화의 지시를 전두환 사령관이 그대로 내게 말한 것이었다. 그 안가는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관리하는 곳으로 사령관이 민간인을 주로 접견하는 장소다. 그래서 내가 에스코트해 김재규를 안가로 데려갔다.
수사관이 김재규를 데리고 안가 2층으로 올라갔다. 언뜻 보니 김재규의 얼굴이 붉었고 쳐다보는 것이 겁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 잠시 후 신동기 수사관이 2층에서 내려와 하는 말이 이랬다.
“비서실장님. 김재규가 범인인 것 같습니다.”
“왜?”
“말하는 것을 보니 횡설수설합니다. 자고 나면 세상이 바뀐다는 겁니다.”
김재규의 정신상태는 정상적이지 않았다. 극도의 긴장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김재규 언동을 통해 그가 범인일 것이란 심증을 갖게 됐고 나는 곧바로 전두환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재규는 모셔야 될 분이 아니라, 서빙고 분실로 이동해야 될 것 같습니다.”
듣고 있던 전두환 사령관이 “바로 옮겨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서빙고 분실로 김재규를 데려간 것이다. 수사과정에서 감춰졌던 정승화와 김재규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승화는 반성은커녕 자기 사람인 장태완 장군을 수경사령관에 임명했다. 전례가 없는 비상 인사였다. 수경사령관 인사는 법적으로 경호실장의 건의를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는 자리다. 그런데 최규하 대통령 대행에게 보고도 하지 않았다. 장태완 장군은 대전에 있는 육군본부 교육사령부에서 군 생활을 끝낼 시점이었다. 나중 장태완은 자기 책에 “나 같은 촌놈을 출세시켜 준 정승화 총장에게 충성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수경사령관 자리는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자리지 총장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 東警사령관 좌천설의 진상
12·12 사태와 관련, 정승화 쪽은 “정승화가 전두환 사령관을 강원도 ‘동해 경비사령관’으로 좌천(左遷)시키려는 것을 눈치채고, 선수를 쳐 정승화를 납치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당시 국내 모든 정보를 다루는 보안사조차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
비상계엄하 보안사 합수부는 정승화를 24시간 감시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언행을 꿰뚫고 있었다. 그 사실은 세월이 흘러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정에서 알게 됐다.
우리 쪽 변호인이 노재현 장관에게 “전두환 사령관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좌천시키려 한 사실을 알았는지”를 물었다. 뜻밖에도 그는 “언젠가 골프장에서 정승화가 내게 전두환의 보직을 바꿨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수사 중인데… 지금은 때가 아니다”고 묵살했다고 증언했다. 왜 그랬을까. 혹시나 ‘전두환 장군은 박 대통령의 골수 추종자이기 때문에 정승화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만약 그때 보안사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문제가 복잡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 선수를 쳐, (자신을) 잡아간 것이라고 거짓 이야기를 만들었다.
1979년 11월 24일 계엄선포 후 첫 ‘민관(民官) 계엄확대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는 이런 말을 했다. 김재규의 시해 결행의도와 매우 유사한 발언이었다.
“개인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신 것은 애석하나 국가와 국민 전체의 불행은 아닙니다. 박 대통령 체제는 잘못됐으므로 시정돼야 합니다.”
그 말에 군 장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자리엔 진종채 2군사령관과 백석주(白石柱·육사 8기) 육사교장, 황영시(黃永時·육사 10기) 장군이 있었다. 이분들이 “박 대통령이 서거한 지 며칠도 안 됐는데 지금 그런 말을 할 때인가. 박정희 체제가 잘못됐다면 군 지휘관도 책임지고 물러나야 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민관 계엄확대회의’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정승화는 이후 언론 간부들과의 모임에서 ‘3K(金大中·金泳三·金鍾泌) 불가론’을 강력하게 주장한 일도 있었다. 계엄사령관은 국가방위에 책임만 지면 되는 자리다. 그런데도 중대한 정치적 발언을 한 것이다.
◆ 김계원의 거짓말
김계원 비서실장이 《월간조선》 2006년 2월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쿠데타를 할 군 병력을 차지철이 보유하고 있었다. 전두환 장군은 차지철의 심복이었고, 차지철이 하나회다 뭐다 뒷돈을 대주었다. 김재규는 쿠데타를 할 능력이 없었다.”
새빨간 거짓말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전두환과 차지철의 관계를 들여다보자. 1960년대 전두환 소령과 차지철 대위가 함께 미국 특수전 훈련부대에 위탁교육을 받으러 간 적이 있다. 육사 13기 유관식 대위도 동행했다. 당시 전두환 소령이 한국 장교 가운데 선임이었다고 한다. 그전까지 차지철의 존재를 전두환 소령은 몰랐다.
어느 날, 늪지를 횡단하는 훈련을 했다. 개인 장비와 기관총 같은 공용화기(公用火器)를 들고 밤새 행군하는데, 죽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무거운 공용화기는 대원들이 몇 분 간격으로 교대해 짊어졌다. 차지철 대위가 공용화기를 짊어질 차례가 됐다. 키가 작은 그가 기관총을 들고 늪지를 헤쳐 걷는데, 미군 누구도 교대를 해주지 않았다. 가다가 늪에 빠져 물을 먹고 낑낑대다가 거의 도착지점에 이르러서야 미군 장교가 바꿔주겠다고 말했다. 화가 난 차지철이 그 미군을 흠씬 두들겨 결국 징계위에 회부됐다.
전두환 소령이 한국군 선임 장교로 징계위에 불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군 사병이 한국군 장교를 감독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키 작은 사람에게 무거운 공용화기를 짊어지게 하고 교대도 안 해줬다. 한국에선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불상사가 생겼다.”
퇴교하면 바로 본국에 송환돼 군복을 벗어야 할 상황이었지만, 전두환 소령의 설득으로 벌점을 받는 선에서 송환을 면하게 됐다. 나중 차지철 대위가 전두환 소령에게 “형님으로 모시겠다. 사실은 육사 12기 시험에서 떨어져 보병학교로 가 임관했다”고 털어놨다고 한다.
이후 차지철은 전두환에게 팍 고개를 숙였다. 1976년 전두환 준장이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가게 됐다. 차지철이 경호실장으로 있었다. 박 대통령 신임을 받고 있던 전두환 장군이 경호실장 자리를 차지할까 봐 차지철은 안절부절 못하며 움츠려 있었다고 한다.
또 차지철이 쿠데타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도 거짓말이다. 수경사는 경호실장 관할이었지만 당시 수경사령관은 육사 8기 전성각 장군이다. 그는 차지철 사람이 아니라, 박 대통령 사람이다. 차지철은 매주 토요일마다 경복궁 내 30경비단에 육군참모총장과 장성들을 불러 사열을 받도록 했다. 게다가 3성의 이재전 장군을 경호실 차장 자리에 앉혀놓고 군을 장악한 듯 과시했지만 누구도 차지철을 존경하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군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반면 김재규는 당시 군내 추종세력이 존재했다. 대표적인 이가 정승화 총장이고 이건영(李建榮·육사 7기) 3군사령관이다. 김재규가 정승화를 총장 자리에 앉혔고 이건영은 1977년 1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데리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 중요 부대를 정승화를 통해 장악하려 했다.
그날 10·26 사건 현장에서 박정희 대통령 사람은 다 죽게 돼 있었다. 청와대 경호원이 죽어야 김재규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얘기다. 궁정동 안가 현장, 김재규 옆 자리에 김계원이 있었다. 김재규가 총을 들었을 때, 총을 붙잡거나 저지했어야 했다. 그리고 안가 밖에는 누가 있었나? 바로 김재규 경호원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이 청와대 경호원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김계원은 살았다. 왜 살았을까. 박정희 사람이 아니었기에 살았다. 시해 후 김계원은 대통령 시신을 수도통합병원 분원에 안치한 뒤 김재규 경호원을 이용, 누구도 접근 못 하게 만들었다.
◆ ‘살기 위해’ 병력을…
12·12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이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라고 정의했다. 정치적 공세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하극상은 상관의 명령에 불복한 것을 말한다. 소장이 대장을 잡아가 하극상이란 얘기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정상 임무를 전두환 합수본부장에게 줬으나 본부장이 그것을 거역하고 정승화를 잡아갔으면 하극상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를 계급, 직책에 상관없이 연행한 케이스다.
쿠데타는 사전 계획에 의해 권력을 탈취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기다렸다. 다시 말해, 권력 탈취는 없었다. 탈취의 어떤 시도도 없었고, 최 대통령이 건재하고 있었다. 계획적으로 병력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장태완 장군이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자 우리는 ‘살기 위해’, 임무수행 차원에서 동원한 것이다.
좀 더 들여다보기 위해 1979년 12월 12일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12·12 사전 계획설’은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鄭柄宙·육사 9기) 특전사령관, 김진기(金晋基) 헌병감을 연희동 한정식집으로 불러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전 본부장은 한정식집에 보안사 참모장을 대신 보내고, 자신은 최규하 대통령을 만나러 총리 공관에 갔다. 정승화 연행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장태완 측은 이 회식 자리에 자신과 정병주·김진기 장군을 불러내 대응할 수 있는 발을 묶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각, 합수부 허삼수(許三守·육사 17기)·우경윤 대령이 정승화 총장을 연행했다는 것이다.
회식 자리 때문에 대응할 수 없었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장태완의 말대로 그 사람들을 빼돌릴 생각을 했다면 연희동 한정식집이 아니라, 서울 외곽이나 강남 깊숙한 요정에서 회식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정식집은 시내 가까운 곳에 있었고 당시 장군들 역시 다들 바빠서 멀리 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또 지휘관은 통신장비를 갖춘 지휘차량이 있고, 수행원도 있다. 군대를 무력화시키려는 계획이었다면 무전기나 통신장비부터 빼앗았을 것이다. 지휘차량과 부관, 운전사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면 사전 모의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 정승화 연행의 불법성 시비
그 자리는 헌병단 조홍(趙洪·육사 13기) 대령의 준장 진급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조 대령의 부탁으로 전두환 사령관이 참석하기로 한 것이고 12·12 이전에 약속이 돼 있었다. 정병주, 장태완 장군과 원래 친하고 전두환 장군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그러니까 자연히 범위를 그 정도로 해서 자리를 같이한 것이다.
왜 하필 그 시각에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했느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당시 합수부 입장에서는 해를 넘겨 정승화 수사를 끌 수 없었다. 1980년이 되면 정치일정상 개헌과 대선을 치러야 하는데, 그러려면 시해사건을 서둘러 매듭지어야 했다. 또 계엄사에서 합수부 측에 빨리 조사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그래서 수사계획상 12월을 절대 넘겨선 안 된다는 원칙에서 결정한 날이 12월 12일이었다.
정승화 연행 시각이 왜 하필 그날 저녁이었느냐고 할 수도 있다. 당시 육군 최고책임자를 연행하기 위해선 극도의 보안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과시간이 지나 공관을 찾아간 것이다.
정승화 연행에 대한 전두환 사령관의 대통령 보고 시점을 그날로 정한 것은 보고상 하나의 요령이었다. 대통령 일과시간이 지난 뒤 사무실이 아닌 공관을 찾아 보고하면 순조롭게 처리될 것으로 생각했다.
일각에서는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 없이 정승화를 연행한 것이 불법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수사기관장은 대통령의 허가가 없어도 자체 판단에 의해 상대를 연행 수사할 수 있다.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서 수사를 하고 말 사항이 아니었다. 거듭 말하지만, 정승화 연행 자체는 불법이 아니었다. 불법이 아니기에 대법원 판결에서도 그 부분은 문제시되지 않았다.
▣ “고문 사실, 부인하지 않겠다”
《박정희의 마지막 하루》와 《제5공화국》을 쓴 조갑제(趙甲濟) 기자는 정승화 전 계엄사령관을 인터뷰하면서 12·12 사건을 파헤쳤다. 그리고 정 장군이 녹음테이프에 구술해 둔 회고록을 정리해 《12·12 정승화는 말한다》는 책까지 냈다.
그와 인터뷰하며 조 기자가 가장 분노했던 것은 12·12 당일 밤 보안사에 끌려간 현직 계엄사령관이 수사관들로부터 물고문을 당하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선비같이 강직한 정 장군은 “내가 6·25 때 왜 죽지 않고 살아남아 이런 치욕을 당하는가”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허화평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고문 과정을 직접 보진 않았지만 부인은 안 하겠다. 그런 사건은 고분고분하게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수사관들이 조사를 빨리 끝내기 위해 고통을 가해야 했을지 모른다. 일제시대부터 내려온 관행이었고 정치 후진국의 악습이라고 봐야 한다. 당시 수사를 책임졌던 중요한 사람들이 그것(고문)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가볍게 생각한 것은 잘못이다.”
◆ 우리가 받은 단죄는…
문제가 된 것은 군사반란을 이유로 병력을 동원한 부분이었다. 다시 말해, 군 통수권자의 허가 없이 임의로 병력을 동원했다는 것이고, 그것이 12·12와 관련해 우리가 받은 단죄다.
이미 12·12 이전에 정승화에 대한 수사 필요성을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최 대통령은 기다려보자는 입장만 노재현 국방장관을 통해 밝혔다. 수사를 지시할 낌새가 전혀 없었다.
전두환 합수본부장으로선 무한정 기다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수사 마무리를 위해선 정승화에 대한 문제해결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지시가 없었다. 보안사 합수부 사람들은 점점 “왜 대통령의 지시가 없을까”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빨리 잡아야 하는데… 정승화의 언동이 좋지도 않고… 혹시 이분들이 겁을 먹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당시 정승화는 계엄사령관으로 이미 절대 권력을 쥐고 있었고, 자신을 단단히 보호하려 했다. 전두환 본부장은 수사 책임자로 대통령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연행 결심을 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정승화 연행을 사후 보고만 했어도 장태완의 수경사와 합수부 간 병력충돌은 없었을지 모른다. 물론, 그랬다면 최 대통령이 섭섭하게 생각할 수는 있다. ‘그 중요한 것을 왜 나한테 말하지도 않고 했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법적으론 보고를 안 해도 되는 것이었다.
12월 12일 그날 오후 6시 반쯤 최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7시쯤 정승화를 연행하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최 대통령이 국방장관을 배석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정승화를 연행하지 말라는 지시는 없었다. 그게 중요하다. 이미 그 이전에 정승화에 대한 처리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이 과정에서 합수부 수사관들로부터 정승화를 연행했다는 보고가 전두환 합수본부장에게 들어갔다. 곧이어 전두환 본부장이 이 사실을 최 대통령에게 구두로 보고했다. 대통령은 “연행하지 말라. (정승화를) 원상 복귀시켜라”는 말씀이 없었다. 최 대통령은 “국방장관이 와야 한다”는 말만 거듭했다. 그래서 보안사가 총동원돼 노재현 장관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노재현 장관은 그날 밤 10시가 지나 전두환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정승화 연행에 대한 자초지종(自初至終)을 간단히 보고했고, 나중 최 대통령하고도 통화했다. 13일 새벽 3~4시쯤 노 장관이 대통령이 머무르던 총리 공관으로 향했다. 공관에 가려면, 보안사령부 합수본부를 지나칠 수밖에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삼청동으로 가기 위해선 여러 검문소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노 장관은 합수부에 들러 전두환 본부장을 만난 뒤 최 대통령에게 갔다. 한쪽에서는 ‘너희가 합수부에서 노 장관 강제로 연행해 겁줘서 대통령에게 데려갔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 “너희 함부로 움직이면 복잡해진다”
12·12는 엄격히 말해 장태완 장군의 병력동원 사건이자 반란 사건이다. 노재현 국방장관이 그에게 병력동원을 지시한 적이 없다. 정승화 총장에 대한 충성심에 자기 독단으로 공격명령을 내렸고 온 사방으로 병력동원을 요청했다. 그와 친한 26사단 배정도 장군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특전사 일부 병력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심지어 수경사 예하 부대에 합수부와 30경비단에 대한 공격 명령을 시달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장태완 장군이 경기도 김포에 있는 포병부대에는 포격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것도 합수부와 30경비단에 포를 쏘라는 것이었다. 포는 원래 정밀 타격이 어렵다. 만약 명령에 따랐다면 어떻게 됐을까. 청와대 인근이 불바다가 됐을 것이다.
합수부는 병력을 동원할 때 황영시 장군이 9사단의 가용한 병력을 빼라고 명령했다. 국방장관이 없어 김용휴 국방차관에게 보고했다. 그래서 9사단 1개 예비연대, 30사단의 1개 연대, 기갑여단의 1개 전차대대, 그리고 2개 공수여단을 동원했다.
무력충돌이 우려되자 노태우(盧泰愚·육사 11기)·유학성(兪學聖·육사 1기)·차규헌(車圭憲·육사 8기)·박준병(朴俊炳·육사 12기)·황영시 장군 등이 총리 공관을 찾아가 최 대통령에게 수습을 부탁했다. 그러나 최 대통령은 양측 병력 동원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 겁이 없었다면 거짓말
나는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입이 바짝 타들어갔다. 겁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앉지도 못하고 서서 전화통에 매달렸다. 가까운 연대장이나 참모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단장이 그러더라도 상황이 그러니 너희 함부로 움직이면 복잡해진다”고 밤새 설득했다. 누구한테 전화 걸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순간순간의 긴장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당시 보안사령관실에서는 유학성·황영시·차규헌·노태우·박준병 장군이 전두환 사령관과 밤을 새웠다. 30경비단에 있던 장군 대부분이 사령관실로 모였다. 마치 사령관실이 비상상황실처럼 돼 버렸다. 그분들이 달라붙어 각 부대에 전화를 걸어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노재현 장관과 유학성 장군, 이건영 3군사령관은 직접 장태완 수경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병력동원을 못 하도록 설득했다.
장성 중 한 분은 끝내 전화를 걸지 않았다. 내가 “전화 좀 거세요”라고 말해도 주저했다. 사태가 일단락난 뒤 “우리 부대는 아무 일이 없나?”고 하더라. 왜 그랬을까. 그도 인간이어서 겁이 난 것이라 생각한다.
장태완 장군은 솔직담백한 군인이다. 정치적으로 앞뒤를 재는 사람이 아니다. 정승화에 대한 개인적 충성심, 군인다운 의리를 드러냈지만, 그런 충성심이 모든 판단을 흐리게 한 결정적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의 가족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우리가 전방을 지키던 9사단 병력 일부를 뺀 것을 두고 미8군이 불만을 토로했다. 9사단 1연대는 미8군의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죽기 아니면 살기인데, 가능하고 안 하고가 없었다. 일종의 블랙홀 상황이었다. 정상적 지휘계통이 무너진 상태이고, 장태완 쪽이 먼저 공격을 시도했다.
미8군 위컴 사령관이 화를 많이 냈다. 모르몬 교도인 위컴은 깐깐한 원칙주의자였다. 이후 대화가 잘 안 될 정도로 갈등이 깊었다. 12·12 이후 장성들이 용산에 있는 미군 골프장에 골프를 치러 갔는데 위컴이 못 치도록 했다. 그런 식으로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10·26과 12·12를 거치며 미군 측은 정말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우리는 사전에 어떤 협조도 하지 않았고 미군의 간섭도 없었다.
◆ ‘To be or not to be…’
10·26 직후 한국 현대사에 블랙홀 현상이 3~4번 왔다. 블랙홀 상황에서는 물리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빛까지 흡수해 버리고 공식도 법칙도 통하지 않는다. 기존 질서와 게임 룰은 전혀 맥을 못 춘다. 그런 위기가 1979년 몰아쳤고 우연이 역사를 지배했다.
엄청난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도 군도 많은 교훈을 얻었다. 군이 정치권력에 함부로 휘둘릴 가능성은 적을 것도 같지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군이 정치권의 눈치를 보게 된 것은 불행한 일이다.
여기서 고전적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명령의 정당성!’ 말이다. 명령을 받았지만, 그 명령이 정당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답변이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답변만이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정당한 임무라고 수행했는데, 상대는 정당하지 못한 일을 했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현상은 정치적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임무가 정당했느냐, 안 했느냐는 것은…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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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7년 동안 박정희 측과 불필요한 갈등이 있었나? 내가 알기로 하나도 없었다. 5공이 박정희의 산업화를 마무리 지었기에 지금의 박근혜가 존재한다. 측근들이 5공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박정희가 국민 가슴 속에 살아나야 측근들도 존재 이유가 있다
⊙ 사회갈등이 1980년 4월 뜻밖에도 강원도 사북에서 시작
⊙ 박근혜 찾아가 ‘새마음봉사단’(옛 구국여성봉사단)을 해산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
⊙ DJ, “5월 19일 오전 10시까지 납득할 만한 조치가 없으면, 22일부터 투쟁하겠다”고 최후통첩
⊙ 만약 북한이 남한을 집어삼킨다면, 우리가 전혀 몰랐던 5·18의 숨은 영웅이 나올지 모를 일
⊙ 5·18은 한국사회에서 전투적인 반미(反美)·종북(從北)·좌파(左派)세력이 등장하는 계기가 돼
고대 희랍의 델포이(Delphi) 신전에 새겨진 첫 번째 경구는 ‘너 자신을 알라’이다. 이처럼 인간 삶에서 간단한 명제는 없다.
사실, 어떠한 역사도 그냥 비켜가는 법이 없다. 당면한 역사를 놓치지 않은 지도자는 성공했고 번영했다. 역사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의 숨결을 놓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1980년 ‘서울의 봄’과 5·17 조치, 그리고 ‘광주 5·18’은 우리에게 어떤 역사의 숨결로 남아 있을까. 역사의 숨결을 놓치지 않은 자는 결단과 선택을 통해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자는 역사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것은 역사가 비켜가지 않기 때문에 전개되는 필연적 현상이었다.
나는 군인으로 일생을 살아가려 했지만 역사는 내 운명을 바꿔놓았다. 상황의 소산이었다. 그 상황에 이르면 선택을 해야 하고 때론 맞서야 한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공과(功過)를 모두 책임져야 했다. 그 책임은 지금도 유효하다.
나의 이야기는 다시 1980년대 초로 돌아간다. 그 뜨겁고 낯선, 그리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시간 속으로.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은 80년 1월 18일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이미 법제처에 헌법 연구반을 구성, 작업을 진행하고 있음을 처음 공개하면서 3월 중순까지 대통령 직속하에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최 대통령은 10·26으로 불거진 박정희(朴正熙) 시해사건을 매듭짓고, 유신체제를 대체할 정치일정을 결정하는 데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사회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12·12로 인해 권부(權府) 내에서 블랙홀 현상이 일어났다면, 1980년 5월 김대중(金大中)을 중심으로 한 재야의 ‘최후통첩’이 두 번째 블랙홀을 낳았다. 그 ‘최후통첩’이 무엇인지는 다시 언급하겠다.
1980년 4월 21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뜻밖에도 강원도 사북에서 일이 터졌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는 당시 국내 최대 민영탄광이었다. 계엄사령부의 집회불허를 거부하고 광부들이 시위를 벌였고 이 과정에서 경찰관이 사망하고 160여 명의 광부들이 다치는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저임(低賃)과 막장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원인이었지만 정부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사북사태의 불길이 다른 노동현장으로 번지지 않을지 초조하게 예의주시했다. 게다가 북한에서 사북사태를 두고 대남 선전선동이 요란했다. 마치 사북 현장을 카메라로 생중계하듯 생생히 전하며 연일 혼란을 부추겼다.
◆ 5공과 박근혜
국내 정치상황도 점점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김재규를 반(反)유신의 의사(義士)인 것처럼 동정하는 여론이 번져났다. 박정희 정적(政敵)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 어떤 식으로든 박정희 유족을 보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박정희 추도식을 국립묘지에서 갖지 못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18년 동안 철권통치하던 박정희가 별안간 사라진 이상, 반유신 세력은 이 기회를 어떤 식으로든 최대한 활용하려 덤벼들었다. 만약 박정희 인사들이 공개 모임을 갖고, 외부 추도식을 가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시비가 붙고 말썽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내가 직접 박근혜(朴槿惠)를 찾아간 일이 있다. 신당동 자택으로 찾아가 그가 이끌던 ‘새마음봉사단’(옛 구국여성봉사단)을 해산하는 것이 좋겠다고 간곡하게 말했다. 정부 재정으로 운영되지 않는 봉사사업은 결국 돈 가진 사람의 도움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 반유신 바람이 거센 마당에 재야 투쟁의 빌미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물론 박근혜는 아쉬워하는 낯빛이 역력했다. 요청을 받아들이겠다는 말도, 거부하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돌아가신 뒤 국민운동 차원에서 새마음봉사단을 이끌었을 것이다.
이를 두고 박정희 정권시절 측근들이 5공을 삐딱하게 여긴다. 속이 좁은 것이다. 5공 집권 7년 동안 박정희 측과 불필요한 갈등이 있었나? 내가 알기로 하나도 없었다. 5공이 박정희의 산업화를 마무리 지었기에 지금의 박근혜가 존재한다. 측근들이 5공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박정희가 국민 가슴 속에 살아나야 측근들도 존재 이유가 있다. 5공 때 박정희에 대한 부정여론을 그냥 내버려뒀다면 어떻게 됐을까.
◆ DJ의 최후통첩
다시 1980년 5월로 돌아가자. 사북사태 이후 반유신 세력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 과정에서 그해 5월 12일 서울역 앞에서 30여 개 대학 소속 학생들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전경버스가 불타고 많은 학생이 연행됐다. 최규하 정부와 군은 재야가 탈권투쟁을 본격화하려는 기미로 판단했고, 관련 정보가 계속 들어왔다. 여기서 재야란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을 말한다.
그래서 시국수습방안이 검토되기 시작했다. 향후 정치적 혼란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불허였다. 그해 3월 DJ는 복권이 이뤄졌으나 YS의 신민당과는 거리를 두었다. DJ는 재야 민중운동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구상을 세웠다. 거기에 추종하는 세력들, 학생과 반유신 투쟁자들이 모여 급진 노선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2일 서울역 시위에 앞서 11일 전북 정읍에서 동학제가 있었다. 정읍은 동학운동의 시발지다. 여기서 DJ는 “동학란은 민주주의 혁명”이라 규정하며 “제2의 동학란이 일어나야 한다”고 선동했다.
이튿날 서울역에서 격렬한 시위가 일어나자 DJ는 동교동 사저에서 소위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 선언문’ 초안을 작성한 뒤 16일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란 명의로 언론기관과 각 대학에 선언문을 배포했다.
선언문에는 비상계엄 해제, 신현확(申鉉碻) 총리 퇴진, 정부 개헌심의위 해체를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DJ는 “5월 19일 오전 10시까지 납득할 만한 조치가 없으면, 22일부터 국민과 더불어 요구관철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최후통첩을 했다.
이 최후통첩이 5·18 광주사태와 연결돼 복잡해지는데, 만약 최후통첩이 없었다면 5·17 계엄확대조치를 단행할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5·17 조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결정이었다.
그날 아침에도 재야 지도자들이 모여 “민주화촉진국민운동본부를 출범시키자”, “최규하 정부가 흐리멍덩하게 나오면 전 국민적 궐기를 결행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보안사 정보처는 재야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손쓰지 않으면 정상적 국가질서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비상계엄확대 조치가 나온 것이다.
◆ “권정달의 1996년 검찰 진술은 거짓말”
권정달(權正達)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이 1996년 1월 역사바로세우기 검찰조사에서 “전두환 장군의 지시를 받아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국회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한 시국수습방안을 작성했다”고 진술했다. 또 “허화평, 허삼수(許三守), 정도영(鄭棹永), 이학봉(李鶴捧) 등과 함께 시국수습방안을 논의했다”고 주장하며 “허화평 비서실장실 옆에 있는 조그만 회의실에서 주로 만나 논의했다”고 했다.
그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참모들이 모여 그런 시국수습책을 세울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비상계엄과 국회해산, 국보위 설치 문제는 모두 정보처 소관사항이다. 수사를 맡은 대공처와 군 업무를 담당하는 보안처의 업무와는 성격이 다르다. 정보·대공·보안처가 서로 머리를 맞댔다고 의심할 순 있지만, 권력기관의 속성상 고유업무 외의 일을 간섭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 방안이란 것도 정부 기능이 붕괴될 때를 대비해 세워둔 여러 시나리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 시나리오는 정보처와 계엄사, 청와대가 관련된 내용이다.
보안사 비서실장 옆 회의실에서 수습방안을 논의했다고 하는데, 내가 일하던 회의실이란 게 변변한 회의탁자조차 없는 좁은 공간이었다.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던 그곳에서 어떻게 심각한 회의를 할 수 있었겠나?
재판정에서 내가 부인하자 권정달은 그제야 진술을 번복했다. 보안사 비서실장 회의실이 아닌, 박 대통령이 시해된 궁정동 안기부 안가에서 회의를 가졌다는 것이다.
왜 권정달은 거짓 진술을 했을까. 그는 민정당 창당 주역이자 초대 민정당 사무총장을 맡은 인물이다. 계엄 도중에 보안사·계엄사·청와대의 협력을 이끌던 이가 정보처장이다. 제일 먼저 구속돼야 할 사람이지만 위증을 해 혼자 처벌을 면했다. 1996년 당시 안기부장이 육사동기인 권영해다. 같은 권씨이기도 하다. 추측건대 권영해가 정부의 지시를 받고 모종의 ‘작용’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5공 주역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중요한 것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담은 5·17 조치가 불가피했느냐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DJ가 이끄는 ‘국민연합’의 ‘5·16 선언’이 없었다면, 재야의 성급한 급진노선이 없었다면, 5·17이 없었을지 모른다.
◆ 광주 5·18의 비극
지금 나의 고백이 5·18 광주시민의 희생을 건드리거나 원점에서 시비할 생각은 없다. 광주 5·18은 군인의 광주시민을 향한 발포가 불가피했다고 해도 비극이었고 지금 와서 이를 새삼 평가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시민들의 계엄해제 요구가 정당했다고 해도 무기고까지 탈취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광주시민도, 군인도 희생자였다. 쌍방 간 어떤 타협점도 찾을 여지가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 또 다른 비극이었다.
광주 5·18은 당대 정치상황이 직접 원인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더 근본을 캐고 들여다보면 분단과 이념, 정치사회적 갈등이 촘촘히 연결돼 있다. 그것을 떠나 본질을 얘기할 수 없다. 5·18은 결국 최규하 정부 퇴진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고, 정국이 더 이상 추스를 수 없는 긴박한 상태로 가게 만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5공이 탄생되는 전환점이 됐다.
광주 5·18은 학생들이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도서관에 가는 것을 공수부대 군인들이 쫓아낸 것이 시발이었다. 등교거부를 당한 학생들이 시내로 몰려가 시민들과 합류하게 되고 계엄군과 충돌, 추격전이 벌어졌다.
그 무렵, 광주시내에 유언비어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계엄군이 젖가슴을 도려냈다’거나 ‘임신부의 배를 군인들이 갈랐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죽이러 왔다’는 식이었다. 이 유언비어가 광주시민의 증오심을 극대화시킨 도화선이 됐다. 소문을 듣고 시민들이 흥분하면서 일이 복잡해졌다.
5월 19일과 20일, 시위군중은 공수부대와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시위군중은 점점 늘어났고 희생자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사람들은 왜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했느냐고 묻는다. 공수부대는 소수 간부요원으로 편성된다. 절대적으로 숫자가 적다. 적지 깊숙이 들어가 게릴라 부대를 조직해 저항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 부대다. 이 부대가 광주에 파견된 것은 계엄사의 우발사태에 대비한 사전계획에 따른 조치였다.
권정달은 “광주사태의 근본원인이 공수여단이란 과격한 부대를 시위현장에 투입해 강경진압한 때문이고, 이와 같은 계획을 입안하고 실행에 옮겼던 전두환·황영시(黃永時)·정호용(鄭鎬溶)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역사바로세우기 재판부와 검찰이 듣고 싶어한 이야기이자, YS 정부가 듣고자 했던 주장이었다. 권정달은 철저히 5공 주역을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발언을 계속했다. 정말 광주를 진압할 생각이 있었다면 공수부대가 가면 안 된다. 보병여단이나 사단이 갔어야 했다. 오히려 공수부대 숫자가 적다 보니 초동진압에 실패, 문제가 복잡하게 됐다. 시민군은 공수부대 수를 보고 만만하게 본 것이 불행을 키웠다고 생각한다.
◆ 아직도 신원 확인이 안 된 12구의 시신
5월 21일 13시경 시위대가 장갑차, 대형트럭을 앞세워 도청 앞으로 돌진을 시도했다. 도청 앞은 공수부대가 지키고 있었다. 몰려오니까, 그땐 이미 자위권 발동 명령이 있었을 때다. 자위권은 위협을 받았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기를 사용하는 것인데, 그 경우 ‘발밑으로 쏘라’는 지침이 계엄사에서 내려갔다.
그런데 위협사격을 아스팔트에서 하니 파편이 튀고 그 유탄에 사람이 맞게 된 것이다. 시민들은 경찰과 예비군의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하고 공수부대와 시가전을 벌이게 된다.
무기고 탈취와 교도소 습격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부퇴진’이나 ‘계엄해제’ 요구와 비교해 지나친 것이다. 평범한 시민의 요구는 아닐 것이다. 목적의식을 갖고 있는, 시민군 속에 숨어 있던 소수세력에 의해 선동된 것으로 군은 판단했다.
교도소는 5월 21일 6차례에 걸쳐 공격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제일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결국 성공하지도 못했다. 당시 교도소에는 2700여 명이 수감돼 있었고, 그들 중 170여 명이 좌익 정치사범이었다.
교도소 습격은 보통 일이 아니다. 혁명군이 자기 동지를 구출하기 위해 습격하는 법이다. 한 번도 아니고, 집요하게 교도소 점령을 시도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무기고 탈취가 당시 44개 지역에서 일시에 일어났다.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가서 장갑차를 탈취했다. 600명이 무장을 했다는데, 그 넓은 지역에서 무기고의 위치를 어떻게 알았을까? 누군가의 지휘통제를 받지 않고서는, 일거에 무기 탈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시위대가 도청에 돌진한 것이 5월 21일 13시경인데, 무기고 탈취는 21일 낮부터 이뤄졌다. 44개 무기고를 낮 12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탈취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5·18 당시 총에 맞아 숨진 사람이 116명인데, 전부 군통합병원에서 검시했다. 그런데 총상 사망자 116명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카빈총에 의해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이것은 시민군 안에서 누군가가 시민을 향해 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다. 계엄군은 M16을 사용했다. 총상을 조사하니까, 뒤에서 맞은 시위 군중이 많았다.
무기고 탈취방법이나 교도소 습격, 총상 사망자 형태로 보면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는 광주시민 다수는 알 수 없는 일이다. 12구 시신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것도 미스터리다. 누구일까.
북한 탈북자들이 “광주 5·18을 다시 보자”고 주장한다. 그들이 왜 광주에 주목할까. 자기네들이 북한에서 들은 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 보이지 않는 손
나는 5·18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과거 경험상, 남한의 정치사회적 격동이 있을 때마다 평양이 들썩였다. 대남 적화노선이 유지되는 한, 북한은 남한 정세에 최대한 영향을 미치려 한다.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 대구 10·1 폭동 때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 어록에 “1960년 4·19 때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을 통탄했다”는 말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직후 대남파트는 전력투구해 정보를 수집했을 테고,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공작을 최대한 감행했을 것이다.
1980년 5월 북한의 대남 방송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파쇼 도당을 까부셔라”는 말이 계속 나왔다. 정보당국의 감청에서 풀 수 없는 암호지령이 급증했다. 공공기관을 습격하고 좌익 수가 많은 교도소를 집요하게 공격하거나 무기고·방산업체를 일시에 덮친 것은 모종의 ‘컨트롤 타워’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게다가 북한은 광주 5·18을 남한보다 더 거창하게 기념한다. <님을 위한 교향시>라는 5·18 영화를 제작하고, 5·18을 북한이 이룩한 최고의 대남 공작사례로 소개한다. 또 탄도탄 제조에 쓰이는 1만t급 프레스를 ‘5·18 청년호’라고 부르고, 천리마 운동을 ‘5·18 무사고 정시 견인 초과운동’이라 칭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지만, 만약 북한이 남한을 집어삼킨다면, 우리가 전혀 몰랐던 5·18의 숨은 영웅이 나올지 모를 일이다.
‘광주의 진실규명을 위한 요구가 결과적으로 전투적 반정부 단체를 형성시켰고, 북한과 손을 잡고서라도 군사독재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좌파세력을 등장시켰다. 그 결과, 종북 좌파세력이 한국사회의 거대 흐름을 형성시켰다’는 주장에 나는 공감한다.
당시의 비극적 상황에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이 있었다면, 그리고 소위 정치권력에 의한 사법부가 5공 인사를 단죄했는데, 그것이 정치적 게임이지 역사의 진실일 수 없다고 한다면, 실체적 진실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토대로 화해하고, 역사교훈으로 가져가야 한다.
5·18은 한국사회에서 전투적인 반미(反美)·종북(從北)·좌파(左派)세력이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그전부터 그런 세력이 있었지만,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을 통해 5공세력이 단죄받자 그 투쟁이 정당화됐으며 결국 반우파 체제 투쟁의 고리가 됐다.
우리 사회를 이끌었던 정부, 이승만(李承晩)·박정희·전두환·노태우(盧泰愚) 정권을 ‘신식민지 반봉건사회’로 규정하며 반민족·친일·친미 파쇼정권으로 몰아세웠다. 광주 5·18에 대한 YS정부의 정치적 단죄는 대한민국 현대사 전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나름의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할까. 이것을 투쟁의 고리로 삼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 결과, 대한민국 군대를 광주시민을 학살한 범죄집단으로 몰아 군에 대한 거부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젊은이들에게 군에 가면 청춘을 허송세월하는 거라 생각하게 만들었고, 군 시설을 혐오시설로, 군 기지 건설과 기지 이전도 반대하게 만들었다. 반미 역시 마찬가지다. 왜 한·칠레 FTA, 한·EU FTA는 놔두고 한·미 FTA만 결사적으로 반대할까. 반미는 5·18을 경험한 386세대 정치인의 기본인식이다.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증오의 씨앗이 자라고 있다. 5·18은 광주시민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반우파 체제 투쟁의 영양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 상태가 계속 방치되면 지역갈등, 이념갈등이 계속 심화될 것이다. 시시비비를 넘어 냉정하게 정리를 해야 한다. 증오의 씨앗도 씻어내고 더 이상 광주의 그늘을 남겨둬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 YS와 DJ의 든든한 배경은 미국
1980년 9월 1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으로 전두환은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10월 27일 새로운 헌법을 만든 다음, 이듬해 2월 25일 실시된 선거인단에 의한 대선에서 임기 7년의 12대 대통령이 되었다.
연임보다 단임이 심플하고 임기 4년은 너무 짧고 8년은 중임의 의미가 있어 밀고 당기기를 거듭하다 단임 7년으로 결정했다. 박정희 정권의 18년 절대 통치가 남긴 갈등이 당시로선 너무 컸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완성하지 못한 산업화를 마무리 짓고, 정당정치를 착근하려면 7년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군 준장으로 예편한 나는 대통령비서실 보좌관과 정무수석으로 5공에 참여했다. 5공 인사들의 의식 속에는 ‘1인 장기집권 체제’는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대전제가 있었다. 그러니까 공화당과 신민당, 자유당과 민주당 같은 양당제가 아니라 ‘다당제’라는 정상적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정치구조로 가야 한다는 대원칙을 처음부터 가졌다.
1981년 1월 15일 창당한 민정당은, 내가 창당에 관여하진 않았으나, 불행히도 ‘공화당’의 재판이었다. 왜냐하면 민정당 창당 작업을 맡은 이들의 지식수준이 과거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당 총재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종의 관료주의 행태 정당이었다. 정당조직은 관료적 멘털리티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또 다른 형태의 정부조직에 불과했다. 당시만 해도 해외 정당정치나 구조를 연구한 이가 드물었다는 변명도 해본다.
민정당 창당 이후 야당인 민한당과 국민당이 창당됐다. 야당이 민정당의 관제정당일 수는 없지만 DJ나 YS 같은 거물 정치인의 발을 묶었으니 5공과 협력하는 고분고분한 사람들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3김(金) 퇴진은 5공으로선 불가피한 조치였다. 구정치인 3김이 한국 정치를 3분(分)했기 때문이다. YS와 DJ는 평생 반유신 선상에서 정치투쟁을 한 인물이다. 그러니 최규하 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었고, JP는 박통 이후 반유신에 의한 시대적 희생자였다. 본인으로서는 억울할 수 있겠지만 반유신의 여러 분위기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 3월 복권된 DJ는 광주 5·18의 내란음모자로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미국정부의 구명으로 82년 12월 미국으로 출국했다. YS는 80년 8월 신민당 총재직에서 물러나 정계를 은퇴해야 했다.
미국정부는 유신시절부터 DJ와 YS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한국의 좌파들은 “미국이 늘 남한우파 체제의 수호자 역할을 해왔다”고 늘상 몰아붙인다. 사실은 그 반대다. 박정희의 5·16 혁명 당시 미국정부가 심하게 불만을 토로했고, 박 대통령이 미국을 순방할 때도 보통 괄시를 받은 것이 아니다.
박정희의 정적들을 항상 미국이 보호했다면 틀린 말이 아니다. 미 고위인사들이 서울에 오면, YS와 DJ 같은 야당 지도자들을 만났다. 미국은 지금이나 그때나 군사정권을 옹호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인정했을 따름이지, 군사정부를 처음부터 지지한 적은 없었다.
미국이 아니었다면 DJ는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YS도 급하면 주한 미 대사를 만나 “군사정부 지지하지 말라. 민주세력을 늘 지지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곤 했다. 반유신 세력의 버팀목이 워싱턴이자 미국 언론이었다. 박정희는 그런 면에서 수세(守勢)에 있었다. 미 정부는 언제나 반유신 체제 지도자들을 백업(Back up)했고, 성원했다.
1982년 12월 23일 결국 DJ가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의 강력한 요구가 있어서 형 면제를 받았다. 그것은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의미한다. 그리고 훗날 다시 돌아와 야당 지도자가 됐고 이념세력들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됐다. 그런 배경에는 미 정부의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정치인 중에는 “우리가 지지해 줬는데 DJ는 왜 우리를 섭섭하게 대했나? 친미 우호세력인 줄 알았더니 반미에 가까운 민족주의 세력이었다”고 생각하는 인사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 언론통폐합, 잘못된 것이었다
5공 출범과 함께 공무원과 언론인 숙정(肅正), 언론사 통폐합, 권력형 부정축재자 수사, 삼청교육대 등 일련의 개혁 작업이 동시에 진행됐다.
언론통폐합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원칙에는 동의했다. 지금 생각하면 잘못된 것이었다. 안 되는 것을 된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도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 자신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군 출신의 사고에서 그런 방안이 나온 게 아니었다. 역대 정부를 봐도, 군이 언론과 원수진 일이 없었다.
다만 언론도 정화의 대상임에는 틀림없었다. 전국적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언론이 온갖 부조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정리해서 건전한 언론풍토를 만들어야 한다고 평범하게 받아들였다. 지나놓고 보니 복잡한 일이 벌어졌다. 군인은 언론을 모른다. 언론통폐합은 결국엔 실패한 것이다. 언론은 권력의 힘으로 정리되는 게 아니었다.
삼청교육대에 대해, 사전에 들은 바가 없었고 심각하게 생각한 바도 없었다. 으레 계엄 때가 되면 폭력배 단속으로 질서를 잡았다. 5·16계엄과 유신계엄 때도 있었다. 상식적으로 있는 모양이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 이상 깊이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 무렵, 고향에 내려갈 일이 있었다. 후배에게 ‘삼청교육대에 잡혀갈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엉뚱한 사람, 전혀 갈 사람이 아닌 이까지 데려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교육 대상자는 각 지역 경찰과 보안부대, 안기부가 공동으로 선정했다. 윗선에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지역별로 하니, 개인감정이 포함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무원 숙정과 삼청교육대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다. 불가피했다기보다 권력을 쥔 집단이 정치적 이유로 그런 조치를 취했다고 보면 된다. 그런 현상들은 흔히 정치후진국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양쪽의 입장에 따라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숙정 대상자 입장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테고, 반대편 입장의 사람들은 정국을 안정시키고 개혁시키기 위해 필요했다고 말할 수 있다.
◆ 연좌제를 폐지한 사연
나는 일찌감치 군복을 벗을 뻔한 사연이 있다. 보안사 대위였던 1968년 8월 동생(허화남)이 남파간첩으로 붙잡힌 것이다. 동생은 1967년 2월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8월에 북한으로 잠입했다. 그곳에서 밀봉교육을 받은 뒤 1967년 11월 경북 영일군 장자면으로 남파됐다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연좌제 탓에 나 역시 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김재규 보안사령관과 전두환·노태우·권익현(權翊鉉)·김복동(金復東) 장군 등 군 선배들이 막아줬다. “사상적으로 문제될 게 없고 열심히 복무했다”고 변호해 주었다. 사실 연좌제는 야만적인 굴레이자, 분단이 만들어낸 민족의 비극이다. 조선시대 때는 연좌제로 3족을, 심할 때는 9족을 멸했다. 일제 때는 반일(反日)인사들을 철저히 탄압, 감시했다. 이들은 아무리 재능이 빼어나도 꽃을 못 피우고 시들어갔다.
광복이 돼도 마찬가지였다. 좌우익이 서로를 얽어맸다. 제주도 출신 공직자 중에 성공한 경우가 많지 않은데 제주 4·3사건 때문이다. 내가 ‘빨갱이’가 아닌데, 진급도 승진도 채용도 안 된다. 소외된 세력은 결국 반정부 감정을 갖게 된다.
긴 안목에서 보면, 반정부 세력을 연좌제가 계속 키운 셈이 된다. 그런 사회는 안정될 수 없다. 희랍이나 로마시대엔 연좌제라는 게 없었다. 내 아버지가 잘못해 자식의 재산이 빼앗긴 적이 없었다. 선진국 헌법에서는 소급 입법, 연좌제, 법에 의한 인신구금을 철저히 금지한다.
나는 연좌제 폐지를 5공화국 헌법에 규정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연좌제는 야만법이자 악법이기 때문이다.
◆ 통행금지 해제와 해외여행 자율화
통행금지 해제와 해외여행 자율화도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들은 통행금지에 익숙해져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계엄해제를 주장하던 야당 정치인도 통행금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습관이 의식을 재단해 버린 것이다.
통행금지 해제는 5공이 북한체제에 대한 열등감이나 콤플렉스가 없다는 상징이었다. 북한 위협을 인식하면서도 그로 인해 스스로의 발목을 묶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또 어느 간첩이 자정을 넘겨서까지 돌아다니겠는가.
술꾼들이 한잔 마시다가도 통행금지 전에 서둘러 헤어진다. 상인들 역시 통행금지 전 막차를 타려고 일찍 셔터를 내릴 수밖에 없고, 공장 역시 24시간 돌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통행금지가 국민경제 생활의 절반을 묶고 있었다.
통행금지 해제는 무지하게 중요한 정치사회적 의미를 지닌다. 북한에 대한 수세적 자세에서 벗어나 국민의 경제활동 폭을 정상화시켜 주었고, 의식 속에 잠재된 냉전(冷戰)사고를 벗겨내는 계기가 됐다고 자부한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해외여행을 대폭 제한했다. 북한의 대남공작에 연루될 수 있다는 점과 외화 유출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당시 해외여행은 아무나 갈 수 없었다. 특히 연좌제에 걸린 사람들은 더더욱 해외로 나갈 수 없었다.
민주공화국에서 여행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여행 가서 북한에 포섭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렇게 포섭돼 북한에 가면 그만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했다.
당시 재무부 관계자가 “외화가 절대 부족해 안 된다”고 고집했다. 나는 이렇게 설득했다.
“돈이 없는 것은 맞다. 그런데 나가는 돈은 파악되지만, 들어오는 돈은 파악이 안 된다. 미국 가서 채소장사 하고 세탁일 하며 자리 잡아 고국에 있는 형제와 가족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열심히 돈 벌어 고향에 송금한다. 국가나 개인이 돈이 없어 유학 가기 어려운 시절, 해외동포들이 맨주먹으로 고생해 성공하는 것을 돈으로 계산할 수 있나?”
당시 해외이민을 갈 때 자기 재산을 못 가져가게 막았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할 수 있다면, 돈을 많이 가지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이민 가도 동포끼리 도와주는 제도가 잘 마련돼 있었지만, 우리는 맨주먹으로 이민 가니 신용대출을 받기가 불가능했다. 뼈 빠지게 10년, 20년 고생해야 됐었다. 국내 재산을 가져갈 수 있다면 10년 고생할 것, 5년만 하면 된다. 그렇게 고생해 성공하면 다시 고국으로 돌려주니 일석이조(一石二鳥)가 아닌가. 정부가 보조금을 주진 못하더라도 자기 재산 가지고 가서 정착하는 것까지 막을 순 없지 않은가.
지금 생각하면 촌스런 생각이지만, 당시는 달러 문제만 얘기하면 벌벌 떨 때였다. 그렇게 해서 규제를 풀고 여행자유화를 했더니 미국이 이민을 쿼터로 묶어버렸다. 마음대로 나가도 좋다고 하니 문을 좁혀버린 것이다. 어쨌든 달러·북한·간첩만 생각했다면 통행금지와 여행자유화를 해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3가지 조치가 5공 정부의 ‘열린 마음’을 상징한다.
◆ 대통령 결재까지 받은 금융실명제 도입을 반대하다
당시 강경식(姜慶植) 재무장관과 김재익(金在益) 대통령경제수석 두 사람은 1982년 이철희·장영자 사건 이후 금융실명제를 추진한다. 강경식·김재익은 실명제가 당시 사회정의 실현의 가장 확실한 제도라고 주장했다.
한국경제의 산업화 초기, 경제개발을 주로 차관(借款)에 의존했다. 차관은 자고 나면 이자가 불어났다. 그나마 불리한 나라 사정에 돈을 빌려쓰는 입장이니 조건이 나쁜 외채라도 빌려야 했다.
실명제를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교과서적 방책이다.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미국과 일본 같은 선진국은 실명제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돈을 숨기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선진국도 아니고 완벽한 시장경제 구조도 아닌데다, 정치권력의 영향이 큰 나라였다. 이런 상황에서 실명제를 도입하면 중소영세업자들만 죽게 된다. 왜 그런가?
당시 일반은행의 큰돈은 대기업이 썼다. 담보가 없는 중소업자들은 돈을 못 빌렸다. 은행 문턱이 워낙 높았기 때문이다. 사채에 의존하고 심지어 형님 돈과 삼촌, 이모 돈까지 빌려서 구멍가게를 차렸다. 사채나 친인척, 친구와의 금전거래는 신고하지 않는다. 돈을 신고하면 반드시 세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법대로 세금 내면 아무 장사도 못한다.
영세업자들이 비싼 사채를 얻어 공장을 돌리는데 그 돈을 실명화하면, 돈 얻어다 쓰기가 더 어려워질 게 뻔했다. 사채는 없어지지 않고 사채이자만 더 높아지고 더 음성화될 것이라 판단했다. 결국 중소기업은 망할 수밖에 없다.
실명제를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는 경우라면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교과서적 아이디어로서 실명제는 틀린 게 아니지만 당시 정치사회 상황을 간과한 것이다.
또 다른 이철희·장영자 사건을 막으려면 실명제가 필요했다. 또 지하경제를 노출시키면, 세원을 확보할 수 있고 선진국형 경제운영도 가능했다. 그런데 고비용 저효율의 정치모순을 방치해 놓고, 기업모순부터 해결하라고 요구해선 되겠는가? 순서가 잘못된 것이다. 정치적 모순을 우선 해결하면서 기업의 모순을 고쳐가야 한다.
금융실명제는 나도 반대했지만 민정당의 반대도 컸다. 결국 대통령도 생각을 바꾸었다. 처음에 도입을 찬성했다가 반대가 심각하게 나오고, 특히 정치자금에 대한 실명제 도입이 어렵다는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대통령이 찬성해 서명까지 한 것을 되돌린 케이스는 한국 현대사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
◆ “그래 구속해야지”
건국 후 최대의 어음사기 사건인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1982년 5월 불거졌다. 당시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불리던 장영자는 전두환 대통령의 처삼촌인 이규광 광업진흥공사 사장의 처제였다. 이들 부부는 자금난을 겪는 건설업체에 유리한 조건으로 자금을 제공하고 대여액의 2~9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아 사채시장에 유통시키고 뒷돈을 챙겼다. 어음을 발행한 기업이 부도로 무너지면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사람은 당장 눈앞에 것만 응시하는 이가 있고, 이면(裏面)까지 보는 이가 있다. 또 당대만 생각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전두환 정권은 7년 후면 끝이 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심판이 이뤄진 것을 역사가 보여주지 않았던가. 5공에서 저질러진, 최고 권력자와 관련된 부분이 제대로 정리가 안 되고 넘어가면 반드시 재론될 수밖에 없는 것이 한국의 정치 문화다.
최고 권력자가 권력을 쥐고 있을 때 깨끗이 처리하는 게 나중 후환을 없애는 길이다. 그 점에서 대통령 참모들이 중요하다. 모시다 때가 되면 그만이고, 책임은 대통령만 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 말을 하는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곤혹스럽다. 내 소신이 대통령의 생각과 충돌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내 의견이 받아들여진 경우도, 안 받아들여진 경우도 있었다. 의견은 늘 상충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철희·장영자 사건 당시엔 대통령과 충돌이나 상충은 없었다. 나중 후폭풍이 복잡해서 그렇지, 처리과정에서 문제는 없었다. “구속이 불가피하다”고 보고를 하니, “그래 구속해야지” 그러셨다. “처삼촌인데 고려해야지” 하는 얘기는 그때 없었다.
그런 일이 재발되지 않게 (사건처리를) 세게 밀기는 밀었다. 대통령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중 세월이 흘러 이야기를 들어보니 집안에서 불편해 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인간사회의 자연스런 현상이다. 섭섭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 번도 직접 표현한 적이 없었다.
◆ 5共을 떠나다
1982년 12월 나는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떠났다. 꼭 이철희·장영자 사건 때문에 떠났다기보다, 물론 그 사건이 영향을 안 준 것은 아니나, 나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잘 떠났다는 게 내 입장이다.
나는 대통령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야말로 대통령 직계가 아닌가. 내가 어디로 가든 그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고, 내 의도와 관계없이 언행이란 것이 연결이 안 될 수 없다.
실은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가졌다. 11대 총선이 끝난 직후 마음속으로 정리했다. 왜냐면 5공이 어느 정도 궤도에 안착했고 국회도 정상화되었다. 내가 남아서 특별히 도움이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육군 대령급 인재가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 인재들을 데려다 쓸 수 있는 자리이다. 정권의 핵심인사가 권력자 곁에 오래 머무르면 나중에 불편해진다.
국가는 한 사람의 힘으로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내가 5공이 끝날 때까지 있다고 해서 5공 말엽의 모순들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한패가 돼 맞장구쳤을 수도 있고, 침묵했을 수도 있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니까.
나는 미련없이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5년 동안, 그리고 5공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엔 가족들을 데려갈 생각이 없었는데 주위에서 같이 가야 한다고 성화였다. 막내가 초등학교 2학년, 큰 애가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였다. 영어 알파벳조차 모르던 아이들을 미국학교에 입학시켰다. 아이들이 큰 쇼크를 받았다.
우리 가족은 고립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교민들과 접촉도 없었고 여행도 많이 다니지 않았다. 헤리티지 재단에 출근하면 내 사무실이 있고 비서가 있었다. 아시아 문제를 연구하는 좌장 역할을 했는데 다양한 미팅에 참여하고, 보고서를 쓰고 읽었다. 원 없이 공부했다.
당시 미 의회는 이란·콘트라 사건에 대한 청문회와 아프가니스탄, 캄보디아 사건 등으로 시끄러웠다. 자주 의회를 찾아 청문과정을 지켜보았다. 내가 흥미를 가졌던 부분은 3권 분립하에서 국가를 이루는 메커니즘이었다. 입법·사법·행정부라는 3개의 톱니바퀴가 어떻게 맞물려 초강대국을 이끄는지 지켜보았다.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어떻게 정책을 수립하는지, 언론과 이익집단, 학계라는 거대한 외부세력에 어떤 영향을 미쳐 정책을 발굴하고 결정하는지 견자(見者)의 눈으로 익혔다.
나는 ‘3/5 타협’이라는 미국 헌법에 쇼크를 받았다. 미국의 헌법은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55명의 대표로 구성된 제헌의회가 처음 개최되면서 본격화됐다. 이 의회는 국민주권의 원리와 양원제 국회, 3권 분립을 구현하는 전문과 7개 조문으로 미국 헌법의 초안을 마련했다. 그런데 인구비례로 하원의원을 뽑는데 노예경제 체제였던 남부는 흑인에게 참정권을 주지도 않으면서 흑인까지 수를 셌다. 그래서 흑인 한 사람을 3/5로 계산해 남북 의석 수를 비슷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미국 국민과 지도자들은 이 건국의 조상들이 만든 모순된 헌법을 결코 폐기하지 않았다. 마치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받은 십계명처럼 존중했다. 나는 미국의 3권 체제를 공부하며 민주주의의 바탕이 무엇인지 공부했다.
그리고 5년 뒤 1988년 귀국했다. 마음속으로 5공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그리고 누구의 도움 없이 정치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귀국해 민정당에 입당, 출마하겠다고 하니 공천을 안 주면서 무소속 출마조차 못하게 했다. 내가 (5공과)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혼자 힘으로 의회정치에 투신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또 5년을 기다려야 했고 1992년 5월 무소속으로 고향인 포항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선거를 치르며 충격을 받았다. 5공 주역인 내가 거대한 관권선거의 벽에 부딪혔던 것이다. 선거풍토가 1950년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무소속으로 국회에 들어갔으나 YS의 권고도 있고 해서 민자당(1995년 12월 신한국당으로 당명이 바뀌었다)에 입당했다. 그러나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을 통해 ‘12·12 반란 가담 및 중요 임무 종사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명예회복을 위해 1996년 4·11 총선에 다시 무소속으로 옥중 출마해 당선됐다.
사실 당선이 목표가 아니었다. “정치재판을 한 YS, 당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당선되면 세상이 알아주지 않을지 모르나 5공이 정당하다는 의미는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선되고 기뻤다기보다 착잡한 마음이 앞섰다. 대법원 최종판결이 나면 당선되는 것으로 끝이 나니까 말이다.
◆ YS에 하고픈 말
YS는 1992년 민자당 후보로 대통령이 됐다. 3당 통합은 민주투쟁과 산업화투쟁 세력 간 통합이었다. 정말 하느님이 계셨다면, 하느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YS는 한때의 적에게 도움을 받아 대통령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 민자당을 진정한 자기의 당으로, 민주정당으로 만들었다면 지금의 한국정치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1979년 10·26 이후 상황을 긴 역사적 안목에서 제대로 정리했다면 한국사회는 완전히 다른 사회가 됐을 것이다.
비록 그가 나를 구속시켰지만, 언젠가 만난다면 “정치적 재판이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재조명해 국민이 화합하고 민족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YS가 무슨 권한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5·18을 내란으로 규정해 역사를 뒤엉키게 만든 과오를 인정하라는 의미다.
정치가 아름다운 것은 각자 입장에서 국가와 민족 앞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은 나름 이유가 있다. “계엄을 해제하라”, “최규하 정권, 물러가라”는 주장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입장 차이 때문에 서로 충돌한다. 다만 대전제가 있다. 대한민국을 위해 고민하며 싸운다는 것이다. 그 위에는 대한민국이 있고 국민이 있고 그 너머에 북한 동포가 있다.
2012년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노선이나 이념갈등의 뿌리는 10·26에서 촉발된 광주 5·18과 직결된 것이다. 1980년의 현대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취재후기]
그는 아직도 군인이었다
―공수부대가 강경진압한 것은 사실 아닌가요.
“뭘 기준으로 강경진압이라고 하나요?”
―피해자가 있고 증언이 있잖아요.
“과잉데모는 과잉진압과 같이 갑니다. 언제나 그랬어요. 충돌이 돼 당기고 미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과잉이다, 아니다 하는 것은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권정달(전 보안사 정보처장)이 이런 말을 했어요. “‘과감히 타격하라. 끝까지 추적 검거하라. 분할 점령하라’는 공수부대의 시위진압 지침이 실행됐다”고요.
“저한테 질문하면서 권정달씨 기록 말고 다른 공부는 안 했나요?
―(다른 자료도) 봤습니다.
“봤겠죠. 그러니까 권정달은 광주사태를 모릅니다. 진압을 어떻게 해라, 출동하라 말라는 것은 자기 업무가 아닙니다.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강경진압과 관련한 일련의 결과가 있지 않습니까.
“대한민국 군인은 언제나 국민 편에 섰습니다. 건국 당시 좌우투쟁부터 한국전쟁까지 군인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목숨을 던졌습니다. 10·26 이후 군이 국민 편에 안 섰다고 하지만… 군은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수행에 매진했습니다. 어떤 두려움도 없이… 설사 발포명령이 떨어져도… 군인들은 그렇게 안 합니다. 전두환의 군대가 아니라, 정호용의 군대가 아니라, 국민의 군대였으니까요. ‘경상도 군대가 전라도 사람 죽이러 왔다’고 유언비어가 퍼졌지만 호남·광주 출신 군인도 많았습니다. 국민의 군대가 이유없이 국민을 발로 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사실을 여러분은 기본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허화평씨와 기자와의 대화는 녹록지 않았다. 증언을 듣기 위해 많은 질문을 준비해야 했다. 지적이고 섬세해 보이는 그였지만 때론 화가 나 언성을 높이기도 했고 탁자를 손으로 탕, 탕 치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군인이었다. 기자에게 “당신도 역사바로세우기 재판 세뇌를 받았다. 질문 자료가 치우쳐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가져야 한다. 잘못 재단한 역사적 기록을 사실로 믿어버려선 곤란하다. 기자는 모든 일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하며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충고까지 했다.
허화평씨는 자신의 입장에서, 그리고 5공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에게 5공의 입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를 8차례 만나 20시간 이상 대화를 나눴다. 그는 지금도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역사를 공부한다. 스스로 사상가라고 말할 정도로 치열한 논리를 닦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10·26에서 시작돼 5·18로 이어진 현대사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각에서 벗어나, 감정의 아픈 응어리에서 벗어나, 5·18내란·반란수괴·불법진퇴·상관살해라는 역사바로세우기 재판결과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역사서술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사실, 광주의 상흔과 아픔은 아직도 한국사회의 정치적 이념적 제반현상을 칭칭 동여매고 있다. “2012년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노선이나 이념갈등의 뿌리는 10·26에서 촉발된 광주 5·18과 직결돼 있다”는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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