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94358&C_CC=AC
..... 이하의 글은 필자가 쓴 박정희 傳記(전기) 중 관련 부분이다.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미군 지휘관 회의에서 소신표명을 계속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을 존경합니다. 한국전 때 웨스트 장군은 제82공정사단의 대령으로서 북한 순천 상공에서 부하들과 함께 낙하산으로 뛰어내려 용맹을 떨친 지휘관이십니다. 저 분의 지휘권 아래로 들어가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는 저 분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군 지휘관들도 이해하는 분위기로 돌았다. 이로써 한국군의 지휘권은 미국-월남측과 협의하여 행사하는 쪽으로 정리되었다. 게릴라 전술의 전문가 채명신 소장은 육군본부에서 작전참모부장으로 일하면서 월남전을 연구했는데 비관적인 판단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월남전의 작전개념을 수립하면서도 나 자신은 월남에 가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디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베트콩은 군복을 입은 정규군이 아니라 민간인 행세를 하는 게릴라들이었습니다. 월남정부는 민심을 떠나고 있었고 월맹 지도자 호지명의 인기는 높아가고만 있었습니다. 아홉 살짜리 꼬마의 호주머니 속에 수류탄이 들어 있고 어린아이를 업은 아낙네의 옷속에 권총이 숨겨져 있는 이런 상황에서 과연 미군의 작전개념인 '수색 및 섬멸작전'이 실효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만 생겼습니다.”
채명신 장군의 작전개념은 '분리 및 섬멸'이었다. 민간인 속에 숨어 있는 베트콩들을 대민심리전을 통해서 분리하여 산속으로 격리시킨 뒤 군사작전을 통해서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채명신 장군은 '미군과 함께 활동하다가 보니 그들이 아시아의 역사 문화에 얼마나 미숙한지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1964년 월맹은 정규군을 월남의 중부고원지역으로 침투시키기 시작했다. 이들은 월남에서 조직된 베트콩을 지원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했다. 무기표준화를 통해서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은 같은 공용화기를 쓰게 되었다. 1965년 초 미국은 월맹의 4개 정규 사단이 월남에서 작전중임을 확인하고 '롤링 선더'(Rolling Thunder) 작전을 시작했다. 이는 정규사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북위 19도선 이남의 월맹 군사기지들을 폭격하는 작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맹정규사단의 남침은 계속되어 1965년말 현재 6만4000명이 월남에서 작전중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월남의 민족해방전선은 인민혁명당이란 명칭을 가졌으나 공산당의 위장조직에 불과했다. 혁명당 당수는 구엔 반 린.
1964년 월맹은 구엔 치 탄 장군을 남파하여 민족해방전선의 군사부문을 총지휘하게 했다. 린은 탄 장군의 보좌관이 되었다. 월남전을 하노이에서 지휘하고 있던 월맹 국방장관 지압은 시간이 공산군 편이란 확신하에서 월남전을 정치전쟁적인 성격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전쟁에서 승패는 전장이 아니라 여론과 언론의 영향을 크게 받는 국내정치 무대에서 결판난다.
국제법상 월남전은 월맹에 의한 불법적인 남침이란 성격을 지닌다. 1954년 제네바 협정에 의하여 월남은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월맹은 17도선을 무시하고 군단 규모의 정규군을 남파했던 것이다. 남파의 방식이 김일성의 남침처럼 기습적인 총공세가 아니라 장기간의 위장침투였기 때문에 국제여론의 반격을 피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베트콩이 월남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반정부 세력인 것처럼 선전했고 세계의 많은 언론들이 '월남정규군의 명백한 남침'을 경시하는 보도 태도를 취했다.
박정희의 입장에서는 국제법을 위반하여 자유진영 국가를 무너뜨리려고 남침한 공산세력을 물리치는 데 파병할 도덕적이고 국제법적인 뚜렷한 명분이 있었다. 월남파병을 통해서 주한미군을 월남전선으로 빼돌리려는 미국측의 의도를 사전에 봉쇄하는 한편, 파병에 따른 경제적 이득과 국군현대화에 대한 미국측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실리와 명분을 고루 갖춘 파병이었던 것이다.
그 뒤 월남과 미군이 졌고 월남이 월맹에 흡수통일되었다고 해서 한국의 파병 이유까지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는 없는 것이다. 평가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국가이익과 국제법,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여야 하는 것이다. 통일된 월남이 이제 와서는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개혁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월맹이 승자였다고 해서 월맹의 공산혁명노선이 옳았고 그에 반대한 한국의 파병은 나빴다고 해석하는 것은 승패와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논의가 될 것이다.
1965년에서 70년까지의 6년간 월남파병에 따른 미국측의 대한 지원총액은 9억2700만 달러였다. 그 주된 내용을 보면 월남에서 한국회사들이 미군과 맺은 구매 또는 공사계약이 3억500만 달러로 가장 많았다. 미군에게 한국측이 공급한 물건값이 1억4400만 달러, 미군이 부담한 한국군에 대한 각종해외수당지급액이 1억3000만 달러, 월남파병을 계기로 유보되었던 군원이관 계획(한국측이 분담해야 할 군사비)액수가 9300만 달러, 한국군의 군수물자 조달에 대한 미군측의 지원이 5000만 달러 등등.
1966∼71년간 월남에서 한국회사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5억3700만 달러에 달했다. 공사 및 용역제공, 한국인 기술자들의 송금, 그리고 군수물자 수출을 통한 외화가득이었다. 월남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8년엔 1억1340만 달러, 69년엔 1억420만 달러, 70년은 9700만 달러에 달했다.
최성기엔 80여개의 한국회사와 1만6000명의 기술자들이 주로 미군과 계약하에 활동했다. 월남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8년의 경우 무역외 수입으로 분류되는 공사-용역 등 월남으로부터의 각종 외화가득은 그해 상품수출액의 36%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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