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이완용에 대한 네티즌 글

계명산 2022. 3. 2. 16:56

[이완용과 3.1운동]

글쓴이 : barikhang, 출처 : https://nambukstory.donga.com/Board?bid=125&#!lid=307365&m=view

 

조선왕조의 내각 총리대신으로 고순종으로부터 전권을 임명받아 을사조약 및 한일합방을 조선대표로 추진함으로써 아직까지 친일파의 거두로 지탄받는 이완용의 3.1 운동 당시 행적은 어떠했을까요?

이완용은 조선왕조의 충신으로서 유교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군주에게 돌아갈 지탄을 뒤집어쓰며, 친일파의 수장으로 일컬어지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무능한 조선왕조에 면죄부를 주는 격입니다.

3.1 운동 당시 이완용이 보여준 행적은 현대 한국인이 뇌리 속에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의 이미지로 단순 해석하기에는 어려운 점들이 많습니다.

이에 본 발제에서는 3.1 운동 무렵 이완용의 행적을 통해, 민족과 반민족의 선악 대결만이 남은 우리 사회 속의 친일파 논의가 얼마나 허구에 가까운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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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이 계획된 시기는 고종의 국장이 치러지던 시기(3월3일)와 겹치는데, 이완용은 당시 고종국장의 조선인 최고 책임자로서 고종의 생전 일대기를 기록한 행장과 덕행을 칭송하는 시책문을 쓰며 장례행사 준비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이완용이 이러한 역할을 맡게 된 까닭은 그가 바로 조선의 대신들 가운데 가장 고종의 총애를 받았고, 고종이 천수를 누리는 동안 곁에서 보필하며 충성을 다 바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즈음 3.1 운동을 계획하던 자칭 민족지도자들은 이완용에게 3.1 운동의 후견인 역할을 부탁하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합니다. 당시 이완용은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의 주역으로서 세간에 매국노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적어도 그 당시에만은 손병희와 최린 등의 ‘민족지도자’들에게 뛰어난 양반관료이자, 당대 최고의 개화 지식인이며, 구한말 자주독립과 외세 배격을 위해 노력하던 독립협회 회장으로서의 이미지가 더 크게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3.1운동 민족대표로 추대된 이완용은 이미 자신이 매국노로서 세인의 지탄을 받고 있으니, 이제와서 자신이 거기에 참여한다고 무슨 득이 있겠냐며 자신의 매국노 이미지가 운동의 대의에 누를 끼칠 것을 우려하면서 손병희 등의 제안을 거절하게 됩니다. 이에 손병희 등은 자신들의 제의를 거절한 이완용이 행여나 일제 당국에 밀고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선비의 지조를 간직한 이완용은 의리를 지켜 거사 당일까지 이를 발설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완용이 일제 총독부의 조선지배에 협력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가 자신의 영달만을 위해 행동한 몇몇 악질적 친일파와 구분되는 점이 있다면, 일제에 비굴하게 알랑방귀를 뀐다든지 혹은 일제에 잘보여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하기 위한 과잉충성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군자의 나라였던 조선의 양반인 그는 말 그대로 유교적 소양을 갖고 있는 선비였고, 한편으로 조선왕조에 대한 충신이었기 때문에 세간이 비난하는 것과 같은 비열하고 수준 낮은 행동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국인의 집단 기억속에 남아있는 매국노 이완용이라면, 3.1 운동 당시 민족지도자들이 후견인 역할을 부탁하지도 않았을 것이거니와, 그러한 이야기를 듣는 즉시 총독부로 달려가 일러바칠 그런 인물이 아니던가요?

 

어쨌거나 3.1 운동을 계획했던 자칭 민족대표들은 이완용 뿐 아니라, 중추원 의장 김윤식, 박영효, 참정대신 한규설, 그리고 이미 친일파로 돌아선 윤치호와 조선 왕족들에게도 참가를 권유했습니다만, 그들 대부분이 참가를 거절하게 됩니다. (이들 대부분은 좌익들의 친일인명사전에 친일파로 등록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중추원 의장 김윤식만 보더라도, 그는 비록 한일합방 체결에 협조하여 자작의 지위를 받지만, 훗날 총독부와 일본 정부에 조선독립을 건의하여 작위를 박탈당하게 됩니다. 한규설은 한일합방에 반대하고 후에 일제로부터 받은 남작 작위를 반납합니다.)

 

이들은 당시 비교적 평판이 좋고, 어느 정도 신망이 있는 인물들이었습니다. 3.1 운동 지도부가 이들에게 참가제의를 했던 것만 보더라도, 조선사회에서 명망이 있는 이들의 참여를 통해 3.1운동의 대의를 드높이고,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기대됐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완용이 일제시대 최대의 독립운동이자 거의 유일한 전국민적 반일시위인 3.1운동에서 민족대표로 추대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가 지금과는 다르게, 적어도 당대의 지식인 집단에서만큼은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신망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이완용은 3.1 운동이 초기 평화적 시위로 계획되었다가 점점 폭력사태로 격화되어가자, 4월 5일에 이르러 마침내 매일신보를 통해 만세운동에 참여한 조선 민중들에게 동포의 자중을 당부하는 경고문을 발표하게 되는데, 다음은 만세운동에 참가한 조선인들의 폭력 행위에 반대하며 매일신보에 기재한 1차 경고문입니다.

 

‘이번에 조선독립운동이라 칭하여 경성 기타에서 행한 운동이라는 것은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국정을 알지 못하는 자의 경거망동으로 내선동화를 해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조선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도배가 우연히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된 민족자결주의를 내걸고 조선의 독립을 기도하여 내지에 있는 조선인 유학생 일부와 모모 종교 관계자 및 사려 천박한 학생 등과 비밀 상통하여 민심을 선동한 결과 이러한 불상사가 야기된 것이다. 나는 차제에 이와 같은 허설에 선동되어 몸을 그르치고 세상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특히 우리 조선인 제군을 위하여 바란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완용의 이러한 경고문을 보며 그의 인물됨을 잘못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나, 이완용의 독립사상과 당시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그의 경고문 내용을 하나씩 따져본다면 그가 어찌하여 3.1 만세 운동의 즈음에 이러한 ‘매국적 발언’을 하게 되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세운동은 애초 평화적 시위로 계획되었으나, 이후 참가자가 점차 늘며 폭력시위로 변질되어 가는 와중에 민간 일본인과 관광서 등에 대한 습격으로 그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러한 소요시위로 말미암아 참으로 독립이 이뤄질 것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사태를 옹호해야 하겠지만, 이는 독립은커녕 총독부를 자극하게되어 당시 하세가와 총독은 엄중 진압을 계획 중이었는데, 만약 총독부에서 군경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진압하게 된다면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위에서 이완용이 언급하고 있는 이른바 ‘민족자결주의’는 세계 모든 민족이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여 타국의 억압과 지배를 부정하고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실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된 민족자결주의는 1차 세계대전의 결과 독일과 같은 패전국의 식민지 국가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고, 조선은 세계대전 이전부터 병합상태였기 때문에, 파리강화회의는 물론이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한일합방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축하를 받으며 체결된 조약이었기 때문에 이완용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뤄진 3.1운동에 대해 ‘현재 조선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행위’라며 맹비난을 가하게 됩니다.

 

또한 3.1 운동 지도부의 구성을 살펴보면, 말이 좋아 민족대표이지 실제로는 천도교 지도자인 손병희, 권동진, 나인협과 최린 등의 15인에, 기독교 지도자인 박희도, 이갑성 등의 16인, 그리고 불교지도자인 한용운, 백용성으로 구성된, 한마디로 종교대표의 모임이었습니다. 아울러 3.1 운동을 계획하고 민중들을 선동한 이들은 정작 거사 당일, 민중들이 결집한 파고다 공원에는 가지도 않았고, 조선귀족들이 즐겨찾던 고급 요정인 태화관(원래는 이완용의 별장)에서 점심을 먹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처벌을 최소화하기 위해 종로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일경에 스스로 자수하게 되는데, 이완용이 볼 때에 시위의 군중들은 소위 민족지도자를 칭하는 종교인들의 선동에 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1차 경고문 발표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이완용은 이로부터 이틀 뒤인 4월 7일, ‘돌이켜 자신을 구하고 다복을 구하라’는 내용의 인정에 호소하는 2차 경고문을 발표합니다. 폭력시위를 벌여봐야 독립은 더욱 요원해지고, 일제의 탄압에 의해 더 큰 피해만 볼 뿐이니 그만 자중하라는 의도였습니다. 다음은 2차 경고문의 일부입니다.

 

‘하세가와 총독에게 관대한 대처를 요청하였으나 총독은 국법에 관한 중대사건이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고, 또 일본 육군성에서 조선의 소요진압을 위해 군대를 증파한다는 방침이 발표되어 동포의 충정으로서 참을 수 없는 까닭에 경고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완용은 이처럼 일제의 조선통치에 협조한 친일파임에는 틀림없으나, 조선 민중들의 생명과 안위에 관심이 없었는가를 돌이켜본다면 이에 확답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실제 우리의 뇌리 속에 있는 친일 앞잡이들의 모습은 3.1 운동 당시 일본군의 최일선에서 조선인들을 때려잡던 그런 이미지 아니던가요?

 

만세운동이 격화되자 조증응, 윤덕영 등 대부분의 친일파들은 숨을 죽이고 눈치를 살피고 있었으며, 송병준은 고종의 국장이 끝나자마자 일본으로 도망쳐버립니다. 이러한 가운데 이완용만이 홀로 남아 조선인들의 자중을 부탁하는 경고문을 발표하며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성난 민중들에게 이러한 동포의 충정은 일종의 협박으로 여겨져 오히려 반감을 키우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물론 3.1 운동이라는 거국적 반일만세시위의 발발과 그것의 전국적 확산은 분명 일부 종교인들의 선동 때문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합방 이후에도 여전히 피폐한 삶을 살았던 농민들, 일본인 노동자들에 비해 턱없이 적은 임금과 장시간의 노동 그리고 비인간적 대우 등에 시달렸던 조선인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이 때에 폭발한 것입니다.

 

하지만 3.1 운동이 완전히 종료된 1920년 12월 29일, 일본 정부는 이완용에게 3.1 운동을 진정시킨 공으로 후작의 작위를 내리는데, 이는 그의 노력이 어느 정도 정과가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만세운동이 어느 정도 진정되어가던 5월 29일. 이완용은 마지막으로 3차 경고문을 발표하게 되는데, 다음은 그 내용 중 일부입니다.

 

‘… 본인이 다시 한마디 하고자 하는 것은 독립지설이 허망함을 우리들로 하여금 확실히 깨닫게 하여 우리 조선 민족의 장래 행복을 기도함에 있다… … 오늘날과 같이 국제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우리가 이 삼천리에 불과한 강토와 모든 정도가 부족한 천여백만의 인구로 독립을 고창함이 어찌 허망타 아니하리오… 병합이래 근 십년 동안 총독 정치의 성적을 보건대 인민이 누린 복지가 막대함은 내외국이 공인하는 바이다… 지방자치, 참정권, 집회와 언론의 문제 등은 조선 사람들의 생활과 지식 정도에 따라 정당한 방법으로 요구한다면 동정도 가히 얻을 수 있다….(때문에)…. 가장 급한 것은 실력 양성이다.’

 

독립을 반대한다하여 과연 매국노적 발상이라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아쉽게도 당시의 조선민족에겐 독립할 힘이 없었습니다. 독립이라는 것이 단순히 일제가 물러남을 의미하진 않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와 중국,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열강들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했습니다.

 

일제시대 대표적 친일파로 불리우는 윤치호는 식당이나 목욕탕 하나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조선인들에게 독립은 사치라는 말을 남깁니다. 독립 만세라고 몇 번 불러 외친다고 독립이 될 바에야, 애당초 나라가 망하지도 않았을거란 얘깁니다. 국경을 지키는 군대도, 무기를 만드는 기술자도, 근대 학문에 정통한 학자도, 선생도 없는 조선인들이 어떻게 독립을 유지할 것이냐는 말이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일본은 약육강식의 광기가 지배하며, 서세동점의 기운이 팽배하던 제국주의 시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얻은 것인데 말입니다. 조선이 일제로부터 독립하여 다른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국가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실로 철부지 같은 생각이라는 것이 바로 이완용과 윤치호 등의 현실 인식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이 점에서 이승만이 위대한데, 그는 미국을 개입시켜 조선의 독립을 쟁취,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본 유일한 조선인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이완용은 본래 당대 최고의 개화지식인이자 독립인사였습니다. 그러던 그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국제적으로 조선지배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자, 대세 상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여 친일파의 길을 걷게됩니다.

 

한편으로 유교질서를 뼛속까지 지니고 있던 조선의 선비이기도 했던 이완용은 종묘사직과 왕실의 안녕을 보존받기 위해 조선 왕실에 가장 좋은 대우를 해주는 일본과 선제적으로 협상을 벌이게 됩니다. 순종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협상을 이루어갔던 것은 물론입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한일병합 이후 조선왕실은 일본 정부로부터 연 120만 엔에 달하는 세비를 지원받게 되는데, 일본 내각 총리대신의 연봉이 1만엔 이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상당한 거액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한일병합 이후 이완용은 순종으로부터 노고를 치하받고 작위와 은사금을 하사받습니다.

 

어쨌거나 이처럼 조선왕실은 일본 귀족들의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 될 만큼 일제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3.1 운동과 같은 거국적 민족운동의 당시에도 조선의 왕족들 어느 누구도 참여를 하지 않았던 것이며, 경복궁을 헐어 총독부를 지을 때조차도 거기에 반대한 조선 왕족들이 단 한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좌익들이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조선의 왕족들이 대거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왕실의 최고 책임자였던 고종과 순종의 이름은 제외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친일파로 몰게 된다면, 한일병합 자체가 합법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는 꼴이라 차마 올리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이완용은 3.1운동과 관련하여 말로만 독립한다고 나불대지 말고, 만세운동을 통한 독립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깨달으라 일갈합니다. 그리고 일제의 무단통치에 불만이 있다면 정식으로 차별시정을 요구하고 자강운동을 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한편으로 동년 9월 10일, 이완용은 3.1운동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하세가와를 대신해 2대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를 방문하여 조선통치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합니다. 13개 항목에 걸친 이 의견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인들의 조선인 멸시에 대한 대목입니다.

 

‘내지의 조선인 멸시와 오만이야말로 조선인들이 가장 불평하는 문제이므로, 이에 대해 관민이 협력하여 개선의 방도를 강구해야만 한다… 미국인들은 마음속으로 조선인들을 개와 돼지처럼 생각하더라도 밖으로는 친절하게 대하는데, 일본인들은 조선인에 대한 멸시를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조선인이 일본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이 조선인을 무시하는 언동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이완용은 한일합방의 상황을 부정하지 않았고, 기본적으로는 총독부의 조선정책에 비교적 적극적으로 협조했습니다만, 내선간의 불협화음은 전적으로 일본 탓이라며 총독부를 강하게 비난합니다. 그리고 조선인데 대한 차별시정과 자치 및 참정권 획득을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그 일환으로 각 도에서 유력한 조선인들 약간 명을 선정하여 중앙의 중추원과 같이 지방 행정에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기구의 설치를 제의합니다. 그는 조선이 독립하는 것보다 일본 제국 내에서 내지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방식을 택합니다.

 

이러한 생각의 옳고 그름을 떠나 과연 당시 무장투쟁이나 만세 시위 운동이 조선인의 삶의 향상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을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있겠습니다.

 

이완용은 일본으로부터 차별받는 조선인들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의 실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총독부의 지배에 피동적으로 따라갈 것이 아니라. 조선인 스스로가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 노력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무력으로는 도저히 독립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닫고, 또한 독립을 이룬다 하더라도 그러한 독립을 유지할 힘이 없다는 현실에 부딪힌, 소위 변절자라는 1930년대 이후 조선 지식인들에게 이어져 결국 자치운동과 민족개량 운동으로 전개되게 됩니다.

 

한편으로, 3.1 운동 이후 조선민중의 독립 의지는 더욱 거세졌다기보다는 20년대 일본의 민주화 흐름에 맞물려 점차 사그라듭니다. 교과서에서 간교한 일본의 속셈을 감추었다고 평가하는 소위 문화통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문화통치는 2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 불리는 일본의 민주화 움직임과 맥을 같이하는데, 조선에서도 한글 문예잡지를 통한 문예부흥이 일고, 조선-동아 등의 민족언론이 창간되어 조선인들의 언로가 생겨나게 되며, 조선인들의 사회진출과 신분상승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에 1920년대 이후 근대화라는 달콤함에 취해 조선의 독립의지는 오히려 꺾여버리고, 독립단체들은 국외로 탈출하게 되면서 한반도 내 독립운동은 완전히 사멸하게 되며, 1930년대 이후에는 조선에 남아있던 지식인들은 죄다 일본 식민지배 하에서 조선의 자치를 추구하는 소위 변절자로 돌아서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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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위안부 그리고 친일]

글쓴이 : james2,   출처 : https://nambukstory.donga.com/Board?bid=125&#!lid=307366&m=view

 

역사에서 진실이란 것은 없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하면 상대적으로 더 객관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해석을 찾는가 하는 것이 근대 역사학의 가장 큰 과제 입니다. 이 것을 전문용어로 ‘역사학의 과학에서 문학으로의 전환’이라고 합니다.

 

이런 실체적 해석을 찾다 보면 소위 우리 사회에 알려진 상식과 다른 부분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특히나, 일제 시대라는 매우 특수한 시기에 발생했던 여러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실체적 해석을 시도하다 보면 많은 경우 친일이라는 비난과 꼬리표를 붙게 됩니다. 제목의 위안부 논쟁과 같은 경우일 것 입니다.

 

독서가 원래 취미인 부분도 있지만, 시민 단체 활동을 하다가 일제하의 조선이란 주제와 관련된 많은 자료를 접하게 되었고, 이 부분에 흥미를 느껴서 나름 대로는 꽤 많은 자료를 읽어보면서 제가 알고 있던 일제의 모습과 사뭇 다른 부분들이 매우 놀라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자료들은 제가 한 때 탐독하였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에는 전혀 나오지 않던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자료들이 매우 파편처럼 매우 조각이 나 있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 파편들을 모아서 하나의 큰 그림으로 만드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결과가 시민 단체 활동을 그만두게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 시민 단체의 활동의 상당부분이 친일 활동에 대한 비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느꼈습니다. 친일은 정말 전가의 보도이구나 하고요. 그리고 친일이라는 단어가 정말 값이 싸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사마천의 사기를 읽어보다 보면 정말 다양한 인간 군상이 묘사됩니다. 사마천의 기술에서 특히나 뛰어난 것은 그 다양한 인간을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개인을 매우 입체적으로 묘사한 것 입니다. 쉽게 이야기 해서 나쁜 놈과 착한 사람이 아니라 각 인간이 처해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 했는지를 담담하게 서술했다는 점 입니다. 그래서 어떤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보고 그 사람을 평가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 입니다. 물론 말미에 자신의 평가를 덧붙이기는 했습니다.

 

여기서 이완용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보지요. 이완용에 대한 다양한 측면에서의 평가를 시도해 보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시도라고 봅니다. 그런데, 다양한 측면에서의 평가가 실체적 해석과는 거리가 있는 매우 주관적 해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봅니다.

 

이완용의 시대가 민족이란 개념이 없었고 국가가 곳 왕조이던 시기 였으니 만큼 이완용의 선택이 민족 보다는 왕조에 우선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완용의 사전에는 민족이란 개념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조선 왕실이 일제에 합병되더라도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왕조적 충신의 개념에서는 있을 수 있습니다. 이완용의 사상적 배경이 근대성과 거리가 먼 유교적 가치관이라고 하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유교적 가치관에 충실한 해석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완용은 대한제국이라는 왕조의 마지막 총리대신이었습니다. 즉, 총리대신 이완용은 대한제국 멸망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위치에 있는 대신이었다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을 져야 충신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정몽주가 고려가 망해가고 있다는 것을 몰라서 이성계 일파에게 끝까지 저항한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지만 자신의 유교적 가치관에 끝까지 충실하게 따랐던 것 입니다.

 

이완용이 자신의 유교적 가치관에 진실로 충실했다면, 조선왕조를 위한 마지막 임무인 조선왕조가 최대한 유리하게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처우에 대한 협상을 끝내고, 대한제국 총리대신으로서의 책임을 지고 자살을 했어야 마땅합니다. 그 것이 바로 유교적 가치관 입니다.

 

왕조가 망했는데 최고의 중신으로써 목숨 이외에 어떤 것으로 책임을 질 수 있습니까. 유교적 가치관에서는 국왕은 어떠한 결과가 나오던지 직접적인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국왕은 곳 하늘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중신들이 그 책임을 지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총리대신 이완용은 그 책임을 지었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완용은 근대적 개념으로도 배신자일 뿐이고 유교적 가치관에도 충실하지 않았던 인간입니다. 그냥 ‘지식인의 도주’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인간일 뿐 입니다. 이완용에 대한 실체적 묘사가 그에 대한 변호가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위에서 이완용의 사례를 들어서 일제시대에 대한 실체적 접근에 의한 해석이 친일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같은 해석 방법을 종군 위안부에 대하여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나는 실체적 접근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일반적인 분들은 그 것을 친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친일파라고 비난을 받게 됩니다.

 

한국 사회의 주류적 접근을 하면 쉽습니다. 비난을 받을 이유도 없고요. 그런데 왜 실체적 접근을 해서 친일파란 비난을 듣게 되는 것일까요. 일제 시대 친일파처럼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설령 조상 중에 친일파가 있다고 하더라도, 조상은 조상일 뿐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조상이 친일파였더라도 친일파라고 하면 될 뿐 입니다. 조상이기 때문에 친일파였던 것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일반 사람들의 친일파란 비난을 들으면서도 실체적 접근을 하는 이유는 바로 그 해석이 과거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해석을 함에 있어서 그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종군 위안부와 관련된 실체적 해석은 어떨까요? 저는 이 글에서 종군 위안부에 대하여 자세하게 쓸 생각이 없습니다. 그 부분은 이미 다른 글에서 많이 이야기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간단하게 요약 한다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일제의 통치 기구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사용하여 종군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종군 위안부 동원이 상대적으로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제 통치 기구는 책임이 있다. 민간인 업자의 행동이라도 사기와 인신매매와 같은 범죄적 행동이 벌어지는 것을 단속할 책임이 있는 통치권자였기 때문이다. 

 

둘째 종군 위안부 동원이 상대적으로 용이했던 이유는 주로 돈으로 유혹하던지 사기 또는 인신매매를 통하여 동원을 했기 때문이다. 즉, 금전적 대가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셋째 종군 위안부의 자발성에 대하여서는 자발성이란 용어를 좁게 해석해야 한다. 자발성이란 의미는 종군 위안부 동원에 동의한 여성은 자신이 향후 매춘업에 종사하게 될 것을 알지만 매춘의 특징인 많은 돈을 단기간에 벌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종군 위안부가 된 여성을 의미한다. 이런 여성은 종군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 중 매우 소수 일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제 시대에도 천민은 존재했으며 천민 여성에게는 조선에서의 삶이나 종군 위안부로서의 삶이나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에 의하여 위안소 업자에게 인신매매된 여성 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구체적 기대 없이 단순한 물질적 유혹에 의하여 종군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은 자발적이었다고 볼 수 없다.  

 

넷째 종군 위안부 모집 이후 위안소 운영에 관해서는 일본군이 직접적으로 일정부분 관여하였고, 종군 위안부는 자주적 노동권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성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중일 전쟁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부분에서 일본 정부는 종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위의 간단한 요약이 제가 생각하는 종군 위안부에 대한 실체적 해석입니다. 위의 해석은 주류적 해석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보기에 불쾌하게 생각될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위와 같은 해석을 하는 사람을 친일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역사 해석이 항상 유쾌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역사 이기도 합니다.      

 

덧 붙이는 사족 한마디. 정치적 성향과 친일은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 입니다. 보수와 친일을 구분해야 한다고 어떤 분이 말씀하셨는데, 정치적 성향으로서의 보수와 행위의 결과로서의 친일은 교집합이 없는 개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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