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읽었던 2차대전 책을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 초반 부분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 그 부분만 다시 보았는데, 내가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두 개다.
첫째, 당시 유럽에 넓게 퍼진 ‘평화 지상주의’가 양보를 거듭하게 하여 히틀러의 간땡이를 붓게 만들었다는 점과 둘째, 그 많던 국가 간의 ‘조약’이 모두 쓰레기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조금 길어지겠만 내가 이해한 부분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얘기와 곁들여 설명해 보겠다.
내가 읽은 책은 가볍지 않다. 부록까지 포함하면 950 페이지나 되고 9명의 전문가가 저술했다. 그래서 그런지 서문을 쓴 사람은 자부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무리 재능이 있는 역사가라 하더라도 자신의 일생 동안 세계대전의 정치적ㆍ군사적ㆍ인간적 복잡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세계대전의 다른 부분은 포기하는 대신 특정 부분의 전문가가 되는 쪽을 선택한다.”
나는 2차대전의 그 복잡한 배경과 수 많은 전투를 자세히 기술할 생각이 없으며 그럴 능력도 없다. 다만 서두에서 얘기했듯이 2 개의 어이 없던 현상에 대해서만 쓰고자 한다. 이건 남북이 정전상태에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정신 자세’와 평화협정을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는 ’평화 지상주의’에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먼저 ‘제1차세계대전’의 최종 산물인 ‘베르사유 조약’부터 보아야 한다. ‘베르사유 조약’(1919.6.28)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 31개 연합국과 패전국인 독일이 맺은 조약으로,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체결. (1871년 ‘프로이센’이 ’독일제국’의 성립을 공식 선포한 곳이 그 방이었음을 감안하면, 독일 국민들은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것)
-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승전국들의 땅 따먹기에 불과. (그 때는 그게 당연한 시대니까…)
-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이태리ㆍ일본이 ‘연합국 이사국’으로서 협상을 주도. (이 조약으로 일본은 ‘산동반도’를 먹었고 태평양 ‘저먼 군도’를 영국과 나눠가졌다. 일본이 이 정도였으니 당시 국제질서에 까막눈이었던 조선의 독립 열망이 얼마나 허망한 몸부림이었던가?)
- 1차대전이 몽땅 독일의 책임임을 명시. (이게 말이 되나?)
- 독일에게 엄청난 전쟁배상금(66억 파운드)을 물리고 독일의 모든 해외 식민지를 박탈. (그 땅을 영국ㆍ프랑스ㆍ남아공 등이 나눠 가짐)
-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보장. (오스트리아와의 합병 금지!)
- ‘라인란트’ 지대를 비무장지대화 하는 등 독일 국토와 국민을 각각 13%, 10% 씩 박탈 (그 땅과 국민을 프랑스ㆍ벨기에ㆍ덴마크ㆍ폴란드ㆍ리투아니아가 나눠 가짐)
- 독일의 육군병력을 10만 명 이내로 제한(1차대전 말 독일 육군은 400만 명이었음), 군함 보유량은 10만 톤 이내로 제한, 징병제 금지, 전차ㆍ중포ㆍ잠수함의 건조 및 보유 금지, 항공기나 공군의 보유 금지. (이건 최약체 군사소국으로 만들겠다는 심뽀)
- 그 밖에 연합국 이사국들 최혜국 대우, 연합국 상품 불공정 규제 철폐, 주요 산업시설과 탄광 양도 의무화 등.
- 이상의 내용을 보고 열 받지 않는다면 독일국민이 아닐 것임. 물론 그 후 ‘도스 안’(Daws Plan, 1923)과 ‘영 안’(Young Plan, 1929)이 비준되어 독일의 배상금은 상당히 경감되었지만, 이미 울화통이 터진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돌리기엔 늦음.
다음엔 히틀러가 ‘합법적으로’ 정권을 잡은 배경을 알아야 한다.
- 1차대전 패배에 따른 독일국민들의 상실감과 무력감. (엄청난 땅과 인구를 뺏김)
-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함. (1차대전 때의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 “이 조약은 평화조약이 아니라 20년 기한의 휴전조약에 불과하다.”)
-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독일국민들의 배신감. (공산주의자들이 등에 칼을 꽂아 패배했다는 의식. 히틀러는 이를 이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탄압)
- 1차대전 후 등장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능. (국민들은 자유를 만끽했지만 그만큼 무정부 상태에 가까워 빈번한 좌우 충돌과 반란)
- 전쟁배상금을 물지 못하는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독한 대응. (마지막 한 푼까지 받아내겠다는 의지로 배상금 지급이 지연되자 1923년 독일의 ‘루르 공업지대’를 점령)
- 이상에 추가하여, 미국 ‘월 스트리트’ 발 대공황(1929.10.29)으로 인한 경제 불황. (미국이 돈을 회수하자 세계경제는 엄청난 타격. 1 파운드 = 100억 마르크)
열 받은 독일국민들은 하도 절치부심해서 이빨이 아플 지경이 되었다. 독일국민들은 독일국민 답게 ’한스 폰 젝트’라는 유능한 상급대장의 지도 아래, 1차대전 패인을 연구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들였고 철저하게 연구했다. 그 결과 혁신적인 전쟁 교리(敎理)를 개발했다.
대표적인게 보병ㆍ기갑병ㆍ공병ㆍ해병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제병합동전술’, 전문 기갑사단을 운영하고 이를 이용한 ‘기동전(전격전)’ 전술, 그리고 일선 지휘관들에게 자율성과 유연성을 부여한 ‘임무형지휘체계’를 들 수 있다.
그 때까지만해도 전차는 보병을 보조하는 역할만 했었다. 전차는 보병의 행군속도에 맞추어야 했으며, 그나마 전선을 돌파하는데만 쓰였기에 필요에 따라 찔끔찔끔 투입되었다.
독일은 고정관념에서 탈피했다.
전차와 장갑차로만 구성된 사단을 만들고, 모든 전차에 무전기를 부착하여 유기적 협조체계를 갖추었으며, 보병을 전차의 속도에 맞추게 함으로써 순식간에 주요 거점을 확보하는 기동전술을 창안했다. ’전차의 아버지’라는 ‘하인츠 구데리안’의 작품이었다.
‘임무형지휘체계’도 혁신적이었다. 그 때까지 전투는 최고 지휘관의 돌격명령에 따라 일제히 진군하여 서로 부딪히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현장 하급 지휘관에게까지 상황에 맞추어 임기응변할 수 있는 자율성과 유연성을 주었다. 독일 제3기갑사단의 어느 보고서에 있는 ‘기갑부대가 원하는 장교상’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기동부대의 지휘에 있어 고정된 공식을 원하는 학자 타입의 장교는 즉시 기갑부대의 상징인 검은 전투복을 벗어야 할 것이다. 그런 장교는 기갑부대의 정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독일은 새로 개발한 교리를 열심히 연습했다.
연습 때는 ’베르사유 조약’의 규제를 피하기 위해 모형 전차를 이용하기도 했고, 소련과 ‘라팔로 조약’을 맺어(1922.4) 소련에서 유능한 장교와 항공기 조종사를 양성하기도 했다. 실제 2차대전 때 독일의 유명한 지휘관들은 이 때 양성된 경우가 많았다.(소련 역시 똑같이 유능한 지휘관들을 배출했지만 1936~8년 스탈린의 대숙청 때 모조리 숙청되어, 독ㆍ소 전쟁 초기에 소련군이 호되게 당한 원인이 되었다.)
이상이 당시 독일의 사정인데 연합국은 어땠을까?
앞에서 2차대전 전(前) 독일의 사정을 살펴 보았다. 이제 서유럽의 사정을 보자.
1차대전 초기에 행진하는 각국 군인들의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대부분 웃거나 떠들면서 마치 소풍가는 기분으로 참전했음을 알 수 있었다. 모두들 몇 개월이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은 4년 4개월이나 끌면서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1차대전은 ’산업화’와 ‘과학화’의 성과가 본격적으로 전쟁무기에 활용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많은 적군을 가능한 한 뻘리 죽이는 무기가 대량으로 사용되었다. 그러자 인류가 상상하지 못했던 규모로 사람들이 죽었다. 군인과 민간인이 각각 700만 명씩 총 1,400만 명이 죽었다.
너무나 참혹한 전쟁이 문명세계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게다가 2차대전 직전 각국의 정치지도자들은 대부분 1차대전의 참호 속에서 비참한 전쟁의 현실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반전(反戰)ㆍ염전(厭戰) 의식이 온 유럽을 지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반성했다. 그래서 ‘평화 지상주의’, ‘협상 우선주의’가 절대선(善)으로 등장했고, 사람들은 1차대전이야말로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믿었으며 또 희망했다. 그런데 불과 20년 만에 1차대전보다 훨씬 더 큰 인적ㆍ물적ㆍ도덕적 대가를 치러야 하는 2차대전이 일어났다.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평화 지상주의’다.
영국을 보자.
영국의 문학계는 반전(反戰)ㆍ염전(厭戰) 서적이 압도적이었다. 영국군 병사들의 참전기가 봇물을 이루었지만, 대부분 1차대전의 비참한 상황을 묘사했을 뿐이었다. 빛나는 승리로 간주한 책은 거의 없었다. 그러자 영국인들은 무조건 평화를 원했다.
질문 형태의 평화투표(Peace Ballot)가 있었고 압도적인 숫자가 평화를 주장했다. 예를 들어 ‘국제협정에 의한 전면적인 군축을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1,000만 명이 찬성했고 반대는 77만 명 밖에 되지 않았다. 옥스퍼드 대학생들은 ‘옥스퍼드 유니언 토론회(Oxford Union Debate)’를 통해 “우리 학생들은 더 이상 왕과 국가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의했다.
1차대전 발발 전, 영국에게 빚을 지지 않은 나라가 없을 정도로 유수의 채권국 가운데 하나였던 영국은,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세계 최대의 채무국으로 전락했다. 대공황까지 몰려오자 국방예산은 대폭 삭감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전쟁을 위한 무기나 전략ㆍ전술 개발에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국은 히틀러의 독일에 대항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요약한다면 반전ㆍ염전 의식에서 비롯된 ‘평화 지상주의’와 빈약한 국방 투자, 이게 영국의 사정이었다..
지정학적으로 영국보다 불리한 프랑스는 어땠을까?
프랑스는 1차대전 때’ 진지방어전’의 성과, 즉 ‘결국 이겼다!’는 생각에 만족하여 생각이 진지방어전에 꽂혔다. 그래서 독일이 공격해오면, 1차대전 때처럼 막대한 희생을 치루게 하여 공격을 포기하게 만들겠다는 ‘방어주의’ 전략을 세웠다. 그 전략의 절정이 ’마지노 방어선’이고, 그런 정신이 ‘마지노 정신’이다.
하지만 ‘어떠한 공격도 물리칠 수 있다’는 ‘마지노 정신’은 오히려 전략선택의 폭을 크게 제한했다. 막대한 비용(70억 프랑)을 들여 건설한 ‘마지노선’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공격전ㆍ기동전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드 골’이 기동전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프랑스 국방장관은 “수 십 억 프랑을 들여 구축한 요새 방어선을 버려두고 어떻게 공세로 나설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마지노 방어선’에는 병영ㆍ병원ㆍ탄약고ㆍ연료창고ㆍ환기시스템까지 있어, 설사 적에게 포위되더라도 항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프랑스가 히틀러에게 항복한 후에도 ‘마지노 방어선’에 남아 저항하던 병사들이 있었다.) ‘페텡’ 원수는 “전쟁이 터졌을 때 전사하게 될 병사들의 목숨과 맞바꾼 강철과 돈”이라고 자랑했다. 유지비도 엄청 들었다. 당연히 다른 쪽 국방예산은 삭감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지노 방어선’에도 약점이 있었다. ‘아르덴’ 숲 쪽과 ‘벨기에’ 쪽에는 건설되지 않았던 것이다. 예산문제도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전략적 고려가 있었다.
먼저 ‘아르덴’ 숲에는 소로(小路) 밖에 없어 독일군 전차가 일렬로 길게 들어와야 했다. 따라서 프랑스는 그 숲이 독일군의 침공로로는 사용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벨기에’ 쪽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건설되지 않았다.
“독일이 공격한다면 (1차대전 때처럼) 벨기에를 경유하려고 할 것이고, 그러면 벨기에는 (1차대전 때처럼) 즉시 중립을 선언할 것이다. 벨기에가 중립을 선언하면 프랑스군은 벨기에로 진입할 수 없다. 따라서 벨기에를 중립국이 아닌 연합국으로 만들어 놔야 한다. 그러면 독일이 벨기에를 칠 때, 프랑스군은 동맹국인 벨기에로 들어가, 거기에서 독일군을 막을 수 있다.”
이 개념은 유일한 공격전략이었지만 막상 히틀러가 벨기에를 쳐들어가자 실행되지 못했다.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에 치중하는 ‘전쟁 공포증’에 빠진 나라가 그런 공격전략을 실행할 리 없었다. 나중에 히틀러는 ‘벨기에’를 치면서 주력은 ‘아르덴’ 숲을 통과하게 하여 ‘마지노 선’을 우회, 프랑스를 점령한다.
게다가 프랑스에는 하나의 약점이 더 있었다. 비판을 능사로 여기고,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며, 평화 만을 외치는 프랑스 특유의 좌파들이 득세했던 것이다. 독일의 천재 선전상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그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괴벨스는 프랑스의 좌우 대결을 부추기고 영국과 프랑스 간의 동맹을 이간질시키는 심리 공작을 했다.
독일 선전부는 “영국의 대(對)독일 강경책 때문에 프랑스마저 전쟁에 휘말릴 것”이라며 반전(反戰)ㆍ반영(反英) 사상을 선동했고 결국 프랑스는 분열되었다. 이런 분열은 정치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는 독일이 침공해 왔을 때 항전파였던 ‘폴 레노’ 수상과 온건파였던 ‘가므랑’ 총사령관의 정쟁(政爭)을 들 수 있다.
하지만 ‘폴 레노’도 그렇게 강단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후일 얘기지만 ‘폴 네노’는 영국수상 ‘처칠’의 항전 설득에 동의했다가. 이내 정부(情婦) ‘포르트’ 백작부인의 설득에 다시 뒤집곤 했다. 그래서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여자는 내가 낮 동안 열심히 해놓은 일을 밤에 다 돌려 놓는다. 나는 그녀를 설득할 수 있지만 그녀와 잠을 잘 수가 없다.”
프랑스 우파는 좌파들의 분열책동과 쌈박질만 하는 정치권에 신물이 났다. 어느 정도냐 하면 공산주의의 씨를 말린 나치 독일에 은근히 호감을 가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히틀러가 쳐들어 왔을 때도 열심히 싸우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프랑스 지도부가 항복하는 모습을 보고 일부 국민들은 “패전은 안된 일이지만 저런 놈들이 당하는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고 한다.
프랑스는 이미 좌우로 분열되어 정신적으로 패배한 상태였던 것이다.
벨기에는 어땠을까?
1차대전 때 혼쭐이 난 벨기에는 전쟁이 끝나자, 영국ㆍ프랑스와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했고 징병제까지 실시했다. 하지만 1926년 무렵이 되자 벨기에 정부에는 “독일이 쳐들어오면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할텐데 뭐하러 강력한 상비군을 유지하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그러다가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자 다시 국방에 투자하여 60만 명의 육군을 보유했다. 하지만 벨기에 역시 침범당할 경우에만 방어전을 한다는 수비 위주의 전략을 유지했다.
폴란드는 어땠을까?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있는 폴란드는 지정학적 영향으로 역사 자체가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1차대전 중에는 많은 폴란드인들이 독일군ㆍ러시아군ㆍ오스트리아군으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비극까지 연출했다. 그래서 1921년 프랑스와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이 조약은 나중에 휴지조각이 된다.)
게다가 독일ㆍ영국ㆍ프랑스ㆍ이태리ㆍ벨기에가 모여 ‘로카르노 조약’을 체결하자(1925.10.16)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로카르노 조약’은 독일과 독일 주변국인 프랑스ㆍ벨기에ㆍ체코 사이의 현 국경선을 존중하며 침범하지 않겠다는 조약이었다. (물론 이 조약도 나중에 휴지조각이 된다.)
‘로카르노’ 조약으로 서부 쪽의 국경선이 안정되면, 히틀러는 동부에서 잃었던 영토 회복에 전념할 것이다. 동부란 바로 폴란드다. 더구나 폴란드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 땅(폴란드 회랑)을 차지하고 있었다. 폴란드는 그 ‘회랑’ 덕분에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폴란드 회랑(Polish Corridor)’이란 ’베르사유 조약’으로 떨어져 나간 독일 영토인데, 그 때문에 독일은 동프로이센으로 가기 위해 폴란드 영토를 지나야 했다. 그 끝에는 국제연맹의 보호를 받는 자유도시 ‘단치히’가 있다.
[여기서 잠시 강조하고 싶은게 있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는 자기나라 군사력만으로 전쟁하는게 아니다. 어느 나라를 정복하면 그 나라의 무기와 자원 뿐 아니라 국민들까지 자국의 군대에 편입시킨다. 이런 식으로 전력을 확충해 가면서 전쟁을 계속한다. 칭키스칸도 그랬고 히틀러도 그랬고 모두가 그랬다.
전쟁의 속성이 그러하므로, 만약 최초의 정복국이 어느 나라를 지나갔다가, 전황이 역전되어 후퇴하면서 또 그 나라를 지나가게 되면, 그 나라 국민들은 불가피하게 양쪽으로 나뉘어 싸운 전과(前科)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국민들 간에 갈등이 야기된다.
이런 피해를 본 대표적인 나라가 폴란드다. 2차대전 때 독일은 폴란드를 거쳐 소련을 침공했고, 후퇴하면서 다시 독일군과 소련군이 지나갔다. 사실 폴란드 뿐 아니라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이 그런 비극을 겪었을 것이다. 그런데 워낙 전쟁이 자주 일어났던 지역이라 그런지, 유럽은 별로 그런 갈등이 없었던 것 같다. 우리의 친일파 논란과 관련해서 음미해 볼 일이다.]
이제 히틀러의 침공 과정과 그 과정에서 있었던 서유럽의 어이 없는 대응을 보자.
전체적으로 볼 때 이 과정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은 히틀러의 계속적인 위협ㆍ회유ㆍ도발과 서유럽의 거듭되는 양보와 합리화다. 서유럽은 왜 그랬을까? 그 때문에 독일군은 이웃 나라를 합병하면서 더욱 강해지지 않았는가?
히틀러를 과격분자로만 생각했지, 과대망상증 환자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히틀러의 지도력으로 독일이 안정될 것”이라며 히틀러의 집권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1차대전 때 영국총리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데이빗 로이드 조지’는 “히틀러가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준 것에 찬사”를 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독일이 소련의 공산주의로부터 서유럽을 막아줄 것이므로(독일 방파제론!), 그건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구나 당시 유럽은 경제위기로 인해 대부분의 국가가 전쟁은커녕 기존 군사력을 유지할 돈도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서유럽식 양보ㆍ합리화의 기저에 깔려있던 심리는 ’평화 지상주의’ 였다. 다시 말해서 “무조건 평화!”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이 서유럽 정치인들과 국민들에게 먹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정말로 전쟁을 하기 싫어했다. 그래서 무조건 전쟁을 피했고 비현실적인 희망에 목을 맸다. 이걸 눈치챈 히틀러는 적어도 1938. 8월까지는 위협과 호전적인 외교를 적절히 구사하면서 야욕을 실현해 나갔고, 서유럽이 수수방관 하는 사이에 이웃 나라들을 합병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서유럽은, 엄청나게 커진 독일 앞에서 한 없이 작아진 자신들을 보게 되었다. 서유럽은 히틀러를 제어할 여런 번의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그 과정을 보자.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 무효’를 주장하더니 국제연맹을 탈퇴했다(1933.10). 이어 교묘한 외교술을 펼치며 폴란드와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어(1934.1.26) 폴란드를 안심시켰다.(이것도 나중에 휴지조각이 된다!)
다음 해에는 징병제를 실시했고(1935.3), 상비군을 50만 명으로 증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육군항공대의 형태로 숨겨놓았던 공군의 존재를 공개하기도 했다. 대부분 ‘베르사유 조약’ 위반이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자신감을 얻은 히틀러는 ’라인란트(Rheinland)’에 눈독을 들였다.
‘라인란트’란 독일과 벨기에-룩셈부르크 사이 라인강 유역으로 ‘베르사유 조약’으로 만들어진 영구 비무장지대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의 의지를 시험해보기 위해 ‘라인란트’를 점령했다(1936.3.7). 역시 ‘베르사유 조약’ 위반이었지만, 이번에도 영국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영국 눈치만 보았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두려워 한다고 간주했다. (이 때의 영국과 프랑스의 무대응은 아직도 최악의 실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라인란트’를 점령하자 히틀러는 고향 ‘오스트리아’에 눈독을 들였다. ‘오스트리아’의 나치 당원인 ’잉쾨르트’ 총리가 독일군을 초대하는 형식으로, 독일군은 ‘오스트리아’에 진주하여 두 나라를 합병시켰다(1938.3). 역시 ‘베르사유 조약’ 위반이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지식인들은 ‘한 민족이나 다름 없는 두 나라의 합병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자신들의 무대응을 합리화했다.(핑계는 언제나 있다!)
다음은 ‘체코’였다.
체코의 ’주데텐란트(Sudetenland)‘는 체코와의 국경선 지역으로 300만 명의 독일계 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자치권을 요구하며 소요사태를 일으키고 있었다. 히틀러는 ‘체코’에게 ‘주데텐란트’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서유럽은 고민했다.
그러자 히틀러는 “저는 단지 체코에 있는 350만 명의 독일인들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뿐입니다”라고 했다. 서유럽 지식인들은 히틀러의 말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맞다고 생각했다. (핑계는 언제나 있다!)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도 히틀러의 말을 믿고 히틀러를 달래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와 협력하여 체코 총리를 설득하기로 했다. 영국 입장에서는, 히틀러가 ‘주데텐란트’에 군대를 진주시키더라도, 폴란드와 루마니아 영토를 지나 체코를 지원할 수도 없다는 현실인식도 있었다. 프랑스 입장에서도 체코와 ‘상호 방위조약’이 체결되어 있었지만, 프랑스는 체코를 위해 전쟁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두 나라 모두 전쟁공포증에 빠져 있었음을 기억하시라.)
드디어 당사국 체코는 초대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영국ㆍ프랑스ㆍ독일ㆍ이태리가 참석한 가운데 ‘뮌헨회담’이 개최되었고(1938.9.29), 독일에게 ’주데텐란트’를 넘겨준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여기서 잠깐! 당사국이 배제된 채 이루어진 조약이라면… 그렇다. 앞에서 기술한 ‘로카르노’ 조약도 그랬다. 폴란드의 운명이 걸린 회담이었는데도 폴란드는 그 조약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되었었다. 이게 국제질서다. 국제적으로 왕따 당하면 이렇게 된다. 우리끼리 우물 안에 모여 삿대질하며 남의 나라 암만 욕해봐야 국제적인 지지가 없으면 이렇게 당한다.)
‘뮌헨회담’에서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를 받으면 이후 체코와의 국경선을 존중하겠다”고 서명했다.(아시다시피 이것도 나중에는 휴지조각!). 뮌헨에서 돌아온 ‘체임벌린’은 영국 공항에서 히틀러가 서명한 합의문을 흔들며, “이 시대의 평화를 보장 받았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다음 해에 체코를 침공하며 프라하에 입성했다.(1939.3.15). 당연히 뮌헨회담은 ‘실패한 유화책의 대명사’가 되었고, 체임벌린은 ‘바보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는 그를 ‘바보벌린’이라고 호칭하겠다.).
이제 폴란드 차례다.
체코가 점령당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그제서야 전쟁이 불가피 하다고 보았다. (정말 둔하다!) 영국국민들도 분노했고, 이런 분노를 반영하여 영국은 폴란드에게 군사적 안전보장을 약속했다.
바보벌린은 1939.3.31 하원 연설에서 ”폴란드 독립을 명백하게 위협하는 어떤 행동이 발생할 경우…… 영국정부는 온 힘을 다 해 폴란드 정부를 도와야 한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영국정부는 이를 위해 폴란드 정부에게 보증을 했다. 나는 프랑스 정부도 이 문제에 관해 영국정부와 입장이 같다는 것을 공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라고 말했다.(바보라 그런지 말도 배배 꼬아서 한다!).
이어서 바보벌린은 1939.4.6 폴란드와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이것도 나중에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정말이지 국가 간 협정은 국익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걸 느끼자는게 이 글의 목적 중 하나다!) 이태리가 발칸반도의 ‘알바니아’를 침공하자 바보벌린은 ’루마니아’ 및 ‘그리스’와도 군사동맹을 체결했다(1939.4.13). 징병제도 도입했다.
과연 히틀러는 폴란드에게 ‘단치히’가 있는 ‘동프로이센’으로 가는 길(‘폴란드 회랑’)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당시 독일에서 동프로이센으로 가기 위해서는 ‘폴란드 회랑’을 지나야 했다. ‘폴란드 회랑’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폴란드에게 뺏긴 독일 땅이다. 바다로 가는 유일한 길을 폴란드가 내놓을 리 없었다.
히틀러에게는 폴란드가 말을 듣던 안듣던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치기로 했지 않은가? 히틀러는 사기로 체결했던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1934.1.26)의 무효화를 선언했다.(1939.3.28). 이제 히틀러가 폴란드를 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히틀러는 폴란드를 치기 전에 소련의 ‘스탈린’을 꼬셨다. 그래서 양국 외무장관의 이름을 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 일명 ‘독ㆍ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는 ‘폴란드를 둘이서 나눠먹자’는 조항도 있었지만 비밀로 했다. (이 조약 역시 2년 후 히틀러가 소련을 치면서 쓰레기가 되었다).
물과 불 같은 존재의 두 나라가 조약을 체결하자 세계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독ㆍ소 불가침 조약’은 두 놈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히틀러로서는 나중에 서쪽(프랑스와 벨기에)을 치기 위해 동쪽(폴란드와 러시아)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스탈린으로서는 히틀러의 공격을 늦추고 폴란드까지 먹고 싶었던 것이다.
동쪽을 정리한 히틀러는 드디어 50개 사단을 동원하여 폴란드를 치고 들어갔고(1939.9.1), 이 날이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일이 되었다.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 ‘작전명령서’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독일 동부 국경지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을 평화적인 수단으로 해소할 수 있는 모든 정치적 가능성이 무산되었기에, 마침내 무력에 의지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멋진 문장이지만 원래 사기꾼의 문장은 아름답다.)
바보벌린은 독일군이 1939.9.3. 09:00 까지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에 돌입한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히틀러는 바보는 그만 벌리라며 무시했다. 철수기한이 지나자 바보벌린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은 최후통첩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영국은 독일과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제야 정신 차리고 말을 간단하게 하는군!)
프랑스도 비슷한 최후통첩을 보냈다. 역시 마감기한(17:00) 까지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도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래봐야 프랑스는 나중에 개박살이 난다. 영국은 개박살 나지는 않았지만 개박살 나기 직전까지 몰린다. 모두 자신들 탓이다. 그렇지 않은가?)
폴란드는 나름대로 분전했지만, 멋있고 고풍스러운 기마부대로 최신예 독일탱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설상가상까지 덮쳤다. 1939.9.17 스탈린이 “소련 정부는 더 이상 ‘소련-폴란드 불가침조약’(1932.7.25)의 구속을 받지 아니한다”고 말하더니 동쪽에서 소련군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조약은 깨지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말한 자가 바로 스탈린이다.)
이건 폴란드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 같았다. 폴란드는, ‘동서 양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한다’는 안드로메다 같은 계획 따위는 아예 세워놓지도 않았었다.
결국 한 달도 못 버티고 1939.9.27 ‘바르샤바’는 독일군에게 함락되었고,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이 나누어 잡쉈다. 폴란드 정부는 바르샤바를 탈출하여 프랑스에서 망명정부를 세웠다가 나중에 프랑스마저 무너지자 런던에 자리를 잡았다. 폴란드군 병사 9만 여명도 탈출했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폴란드는 ‘카틴 숲 대학살 사건’도 겪는다.
이는 1940년 소련 비밀경찰이 포로로 잡은 폴란드군 장교, 교수, 경찰, 의사 등 폴란드 지도층 인사 22,000여 명을 처형한 다음 ‘카틴 숲’에 암매장한 사건이다. 꼭 그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그 후 똘똘한 지도자들이 사라진 폴란드는 종전 후에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한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이 대량 학살됐던 1921년 ‘자유시(알렉셰프스크) 참변’과 유사하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이렇게 당한다.
이제 ‘가짜 전쟁(Phony War)’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때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도 서유럽국의 ‘평화 지상주의’가 만든 작품이다. (그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기세 좋게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폴란드를 보호해 주겠다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번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아니, 하긴 했다. 시늉만 내서 그렇지. (그래서 ‘포니 워’라는 별명이 붙었다.)
영국은 1939.9.30 까지 14만 명의 병력을 프랑스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공세로 나설 계획은 애초부터 없었다. 반면 프랑스군은 1939.9.7 독일로 진격하기는 했다. 하지만 독일군이 ‘지그프리트 선’ 너머로 철수하자 8 km 정도 들어간 지점에서 정지했다. 프랑스군은 발만 겨우 걸친 상태에서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고, 그마저도 폴란드가 항복하자 곧장 다시 프랑스로 철수했다. 이게 ‘포니 워’의 전말이다.
만약 연합군이 그 때라도 전면공격을 했다면’ 폴란드군과 싸우고 있는 독일은 큰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군 50 개 사단은 사실상 당시 독일이 가동할 수 있는 전 병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유럽 쪽에는 11개 사단만이 남아 지키고 있었다. (전쟁 말기 독일군 사단은 300 개에 달했다.)
반면 독일 쪽 국경선에 배치되어 있던 연합군은, 프랑스군만 하더라도 그 10 배에 달했다(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육군이 강하다). 하지만 아무리 유리해도 뭐하나? ‘전쟁공포증’에 빠진 나라가 공격을 할 리 없었다. 실제로 전쟁 후 독일의 ‘빌헬름 카이텔’ 원수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 초반, 우리는 ‘지그프리트 선’과 ‘마지노 선’ 사이에서 국지적인 소규모 교전 외에는 별다른 군사행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우리는 왜 프랑스가 이 소중한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서방 열강이 우리와는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앞에서 말했던 ’폴 레노’ 수상과 정쟁(政爭) 했던 ’가므랑’ 원수는 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프랑스 출산율은 매우 낮다. 1차대전 때처럼 피를 흘리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인적자원이 없다. (그 때 20대의 40%를 포함하여 프랑스 젊은이 160만 명이 죽었음). 인명손실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한 과학전쟁을 해야 한다.”
(출산율이 걱정되니 과학전쟁을 하잔다. ㅋㅋㅋ “핑계의 샘은 마르는 법이 없다”는 명언 – 이거 내가 만든 말 – 이 생각난다!)
한편 이 무렵(1939.11.30~1940.3.13)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는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한 ‘겨울 전쟁(Winter War)’이란게 있었다.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소련군은 핀란드를 얕잡아 보고 무질서하게 쳐들어 갔다. 핀란드군은 강력하게 저항했고 소련군은 크게 고전했다. (유명한 핀란드 스나이퍼 ‘시모 해위헤’도 이 때 활약했다). 이 전쟁에서 핀란드군은 25,000 명이 죽었는데 위대한 ‘붉은 군대’는 20만 명이 죽었다. 이를 본 히틀러는 ‘소련을 쳐도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도 결국 핀란드는 ‘겨울 전쟁’에서 패하여 땅을 뺏기고 평화조약(?)을 체결했지만, 대신 소련에게 원한을 가졌다. 그래서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 때, 독일과 함께 소련을 쳐들어가서(계속전쟁ㆍContinuation War) 빼앗겼던 땅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이후 독일의 패배가 명백해지자 독일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또 다시 소련과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그 땅을 또 뺏겼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핀란드는 종전 후,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는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아마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을 혼내준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제 히틀러는 대서양과 북극해를 장악하고 자원도 더 확보해야 했다. 그래야 소련을 쳐들어가도 서유럽의 소련지원을 차단할 수 있었다.
다음 먹이는 노르웨이였다. 독일은 노르웨이 철광에 의존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노르웨이를 치기 위해 경유지인 ‘덴마크’로 쳐들어갔고(1940.4.9), 덴마크 정부는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하여 당일에 항복했다. 독일군은 곧장 노르웨이까지 쳐들어가, 뒤늦게 노르웨이에 들어온 영국군에게 개피를 발라주면서 노르웨이까지 점령했다.
이제 유럽 대륙에는 프랑스와 ‘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만 남았다.
1940.5.10 히틀러는 ‘베네룩스 3국’과 프랑스를 동시에 쳐들어갔다. 이 날 영국의 ‘바보벌린’은 사임했고 ‘윈스턴 처칠’이 새 총리가 되었다.
1차대전 때처럼 ‘독일군이 벨기에를 통해 들어오고 있다’고 확신한 프랑스군은 벨기에 쪽에 전력을 투입했지만 그건 히틀러의 양동작전이었다. 히틀러는 프랑스 바보들이 ‘통과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아르덴’ 숲을 지나 ‘마지노 방어선’을 우회하여, 프랑스군을 남북으로 가르며 파리로 쾌속 진격, 프랑스의 항복을 받았다.(1940.6.22).
세계는 경악했다.
1차대전 때 독일은 4년여의 기간 동안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200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면서도 영국과 프랑스에게 패했었다. 그 때문에 반란까지 일어나 카이저(빌헬름 2세)는 쫒겨났고, 독일 땅과 국민들을 잔뜩 뺏기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히틀러의 군대는 겨우 13,000 명의 전사자만 내면서 두 달도 안돼 프랑스를 정복한 것이다.
한편 프랑스로 들어간 독일의 다른 전차부대는 프랑스 서부 ’뒹케르크’ 해변으로 달렸다.
지원군도 없고 병참선도 끊기고 철수할 항구들까지 점령당한 영국과 프랑스군 36만 6천 명이, 좁고 엄폐물도 없는 ‘뒹케르크’ 해안에 바글바글 모여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이라는 철수작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물거리다가는 몰살 당하거나 전원 포로가 될 위기였다.
다행스럽게도 평년과 다른 기적같은 날씨가 계속되어 ‘다이나모 작전’을 도왔다. 비가 오면서 독일군 탱크부대는 15 km 전방에서 진창에 빠졌고, 낮은 구름은 독일공군의 시야를 방해했으며, 잔잔한 바다는 작은 배까지도 운항 가능하게 했다. 영국은 온갖 크고 작은 배 약 900 척을 징발, 독일공군의 폭격을 받으면서 1주일간에 걸쳐 철수작전을 수행했다. 이 작전에서 영국은 항공기 177대, 호위함 10척을 잃었다.
날씨 덕에 성공했지만(사실 날씨가 영향을 준 전쟁은 많다), 대부분의 장비를 ‘뒹케르크’ 해변에 버려두고 왔기에, 이후 영국은 미국이 참전할 때까지 내내 장비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곧 이어 영국에서는 ’다이나모 작전’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바보벌린 등 대(對)독일 유화론자들이 이 대재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용의 ‘죄인들(Guilty Men)’이란 책이 나와 영국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윈스턴 처칠’도 이 책에 동조적이었다.
프랑스가 항복하자 프랑스 함대에 대한 처리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막강한 전력의 프랑스 함대가 어느 쪽에 붙느냐에 따라 양측의 전력이 좌우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항복문서에는 ‘추축국 감시 하에 무장을 해제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다를랑’ 제독은 프랑스 정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알제리 항구에 함대를 집결시켰다.
영국정부와 런던으로 망명한 ‘자유 프랑스군’은 프랑스 함대를 연합국에 합류시키거나, 최소한 프랑스 해군이 자침시켜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협상이 실패하면서 결국 영국해군이 프랑스 함대를 포격해 몽땅 침몰시켰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 해군 1,200 명이 죽었다. 이런 비극도 발생하는게 전쟁이다.
이제 남은건 영국 뿐이었다.
독일의 영국 상륙작전인 ‘바다사자 작전(Operation Sea Lion)’이 성공하여 독일군이 상륙하면, 육군이 약한 영국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영국은 패닉상태에 들어갔다. 당시 영국주재 미국대사 ‘조지프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는 미국정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이제 영국은 끝이다.”
이번에도 히틀러가 평화공세를 폈다.
“나는 영국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하지 않으며 대영제국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1940.7.19 에는 이렇게 말하며 평화협상을 제안하기도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이성과 상식에 호소하는 것이 나의 양심에 관한 문제이기 이전에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나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다 …… 앞으로 지속될 전쟁에 희생될 사람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나는 독일국민들을 위해서라도 그러한 희생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 눈물나게 아름다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또 ‘평화 지상주의자’들이 등장한다. 일부 영국인들이 히틀러와의 협상을 통해 평화를 달성한다는 생각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들이 내세운 논리는 이랬다.
“영국이 고개를 숙이면(평화협상 제안을 받으면), 위기감을 느낀 미국이 중립에서 벗어나 독일에게 대항할 것이다. 그러면 소련도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독일과의 협력을 재고할 것이다.” (평화만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핑계의 샘이 마를 리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항전을 지지했고, 이후 치열한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이 승리하여, 히틀러는 ‘바다사자 작전’을 몇 차례 연기하다가 결국 취소했다. 여기에는 ‘런던 공습’을 결정한 히틀러의 전략적 실수가 있었다고 한다.
원래 독일공군은 영국 공군기지에 대한 폭격에 전념했었다.
그런데 독일 폭격기 1대가 실수로 ‘런던’에 폭탄을 떨어뜨렸고, 그 보복으로 영국 공군은 ‘베를린’을 폭격했다. 그 바람에 머리가 돌아버린 히틀러가 ”영국인들이 우리 도시에 폭탄을 떨구었으니 우리는 그들의 도시를 완전히 쓸어버릴 것이다”라고 연설한 후, 독일공군에게 “영국도시를 폭격하라”고 명령했다. 그 덕에 빈사상태에 몰렸던 영국공군이 재편성되어 독일공군과 항공전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히틀러는 이듬 해 ‘독ㆍ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 붉은 수염 작전)’을 승인하며, 1941.6.22 소련으로 쳐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영국은 간신히 살아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그런 식으로 전개되었다.
여담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도덕적으로도 인류에게 엄청난 딜레마를 안겨 주었다. 나중에 소련이 연합군에 합류하면서 연합군은, 히틀러 못지 않게 사람을 학살한 스탈린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련은 부인하지만 소련이 독일군을 몰아낸 데에는 이런 막대한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독일과 싸우는 소련에게 미국이 제공한 트럭만 해도 44만대였다.)
전쟁 중에 수 많은 작전을 하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거나 이용당한 ‘착한 사람들’(예를 들면 각국의 망명 정부와 그 군인들, 유태인 및 집시들, 제3국가들)이 눈물을 삼켜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한 전후에는 동구라파 여러 나라가 공산화되면서 소련의 위성국가로 편입되어, 국가가 수 십년 간 정체되거나 국민들은 압제에 신음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는 천만다행으로 독립하여 오늘의 한국이 되었다.
이 전쟁에는 56개국이 참전했다. 그리고 독일군 280만 명과 민간인 200만 명이, 소련군 630만 명과 민간인 1,700만 명이, 서유럽 연합군 180만 명과 민간인 1,050만 명이… 총 5,500만 명이 죽었다.
이 글의 도입부에서 나는 2 개의 어이없는 현상이 히틀러를 초대했다고 말했다.
첫째, 힘도 없는 주제에 ’평화 지상주의’에 물들었던 것, 둘째, 힘도 없는 주제에 ’평화조약이니 불가침조약’이니 하는 ‘종이 쪼가리’에 목을 맸다는 것.
긴 얘기를 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평화? 그거 말로 되는게 아니다. 조약? 그거 언제든지 쓰레기로 변한다.”
그리고 또 하나.
“좌익? 날뛰게 놔두면 국가가 망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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