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다녀왔습니다. 휴양차 갔지만, 긴 휴양 얘기는 필요 없기에... 짧은 기간 관광했던 호치민 시에서의 감상 3 개만 올리겠습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첫째 단상 - 자유, 풍요, 젊음의 나라>
베트남에 대한 첫 인상은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젊은 나라" 라는 것이었습니다. 거리나 공원에서 떠들고 노래하고 사진 찍는 가족들, 백화점이나 마트의 쇼핑객들, 대부분 20~30대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물결... 이런 것들이 그런 느낌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숙박/음식업소의 종업원들도 매우 밝고 친절했습니다.
(호치민 시 '여행자 거리'의 밤 - 서양인들이 많고 시끄럽다.)
(오토바이 물결 - 운전자들이 대부분 젊다. 활력이 느껴진다.)
(마트에서 쇼핑하는 사람들 - 계산 대기 줄이 길다. 풍요가 느껴진다.)
(호치민 시청 앞 광장 - 가족끼리 온 사람들이 많다. 원내가 호치민 동상인데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베트남은,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아직 공산주의 국가입니다. 방종적이고 말초적이며 썪어빠진 자본주의에 대한 위기감 때문인지, 아니면 "그럴수록 우리의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는 교육 차원인지, 베트남 거리에는 '금성홍기'가 곳곳에 걸려 있습니다. 심지어 시골길에도 끊임 없이 길게.
(거리에 내걸린 금성홍기 - 내게는 공산주의 위기감의 반영처럼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북한과 비교를 해봤습니다.베트남의 자유와 풍요를 보니, "북한이 베트남 정도만이라도 개방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북한인민들도 자유와 풍요를 향유하고, 한반도에도 평화가 정착되며, 드디어는 얼마 안가 통일도 가능할 것이라는 소망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김정은이 존재하는 한, 핵무기가 있건 없건 간에, 북한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베트남처럼 개방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우울했습니다. 베트남만도 못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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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단상 - 사이공 몰락의 계절>
'전쟁박물관'에 가봤습니다. 주로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의 학살 장면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국군 관련 사진도 있습니다. 전쟁의 비극이 느껴졌습니다. 관람객들은 대부분 서양인들이더군요. 선입관 때문인지 몰라도 그들의 인상이 호리호리하고 히피적인, 소위 인권과 평화만을 외치는 반전주의자들처럼 보이더군요.
베트남전의 비극을 상징하는,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사진들도 몇 장 있었습니다. 체포된 베트콩 머리에 권총을 쏘는 월남군 장교의 현장사살 사진, 네이팜탄이 터지자 발가벗은 몸으로 달려나오는 여자 아이 사진, 그리고 월맹 탱크가 월남 대통령궁 정문을 통과하여 진입하는 사진 등.
가부좌 자세로 꼿꼿하게 분신자살하여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던 고승 '틱쾅둑'의 분신장면을 찍은 사진은 못 보았습니다. 원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촉박한 내가 못 본 것인지...? 옛 월남 대통령궁도 가봤는데, 특히 그곳에서 "사이공 몰락의 계절"을 상상해봤습니다.
(옛 대통령궁 사진 - 이 정문을 통과하는 탱크 사진은 베트남 적화의 상징이다. 그 탱크는 뜰 안에 전시되어 있다.)
대통령궁에는 월남 대통령의 집무실과 침실이 있었습니다. 부통령 침실도 있었고 내각회의실도 있었습니다. 지하에는 전쟁지휘부가 있었구요. 일단 보시죠.
(내각 회의실 - 월남 대통령과 각료들은 여기서 수많은 회의를 했을 것이다.)
(지하 전쟁지휘실에 있는 통신시설 중 하나)
눈을 감고 몰락의 계절을 상상해 봅니다. (이하 [괄호] 안은 모 기자의 글에서 발췌)
[1973. 1. 27. '파리평화협정'이 타결되었다. 여기에 미국/월남/월맹/베트콩/영국/소련/프랑스/중국/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까지 온갖 나라들이 서명하여 평화를 보증했고 월맹은 협정 준수를 공언했다. 미국은 월남에 최신식 무기를 넘겨주었고, 월맹에는 4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했다. 그래도 믿지 못해 월맹 외무차관 등 150 명을 사이공 시(현 호치민 시)에 인질로 잡아두었다.
미국은, 공산군이 휴전협정을 어기면 "즉각 해군과 공군을 투입, 북폭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 하기로 약속했다. 월남과는 '방위조약'까지 체결했다. 당시 월남정부는 월남 인구의 90.5%를 지배하고 있었다...]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 봅니다. 지금은 1975년 4월입니다. 월남의 안보를 철석같이 약속했던 '닉슨' 대통령은 반년 전에 사임했고, 후임 '포드' 대통령은 힘이 하나도 없을 때입니다. 하지만...
[월남에는 공산 프락치들이 침투하여 사회를 뿌리채 흔들고 있었다. 천주교 '짠후탄' 신부, 불교 '뚝드리꽝' 승려 등이 ‘구국평화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이라는 조직을 결성했고, 여기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시민단체들이 연대했다. 공산 프락치들이 이 조직에 대거 침투, 이 조직을 거대한 반정부 세력으로 만들었다.
종교인/대학생/직업적 좌경인사/반전운동가/인권단체가 총집결하여 반정부 구호를 외쳤다. 사이공에만 100여 개의 좌익단체가 수많은 언론사를 설립하고 좌경화 공작을 전개했다... 그러자 월남은 내부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베트콩의 공세가 가열되자 월남 정부는 학생들을 징집하기 위한 '병역법' 제정에 나섰다. 그러자 학생들은 "군대에 갈 수 없다"며 시위했다. 언론은 공산당의 선전선동 도구가 되었다. 월남정부가 언론의 이적행위를 다스리기 위한 법률안을 제정하자, 좌익 언론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언론 탄압'이라고 항거했다. "조국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외치던 우익 인사들은 다음 날이면 시체로 발견되었다...]
[1975. 2. 5, 월맹 육참총장 '반띠엔둥' 대장이 '호치민 루트'를 타고 중부 월남 고원지대 요충지인 '반 메뚤'의 서쪽 밀림에 잠입했다. 3월 10일에는 '프레이크'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고, 3월 16일에는 고도(古都) '후에'를 점령했다.
'티우' 대통령이 "정쟁(政爭)을 중지하고 단결하여 자유월남을 지키자"고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지만, '짠후탄' 신부는 이렇게 응답했다. "중부 월남 고원지대에서 반민주/반독재/부정부패자 '티우' 정권에 항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을 뿐이다. 그곳에 월맹군은 없다. 티우는 책임지고 사퇴하라..."]
[월남군은 전투도 제대로 못하고 도주하거나 투항했다. 3월 26일에는 '다낭'이 함락됐다. 이후 월맹군 15개 사단은 어떤 저항도 받지 않고 사이공으로 쾌속 진격했다. 4월 8일에는 월남군 조종사가 공산군을 폭격하기 위해 이륙했지만, 기수를 돌려 사이공의 대통령궁에 폭탄을 투하했다...]
그 대통령궁 사진이 위에 있습니다.
위와 같은 혼란 상황에서 저 '내각회의실'에는 누가 모였고, 그들은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요? 아마 도망간 사람이 태반이고, 대책이라고 내세울만한 안건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서로 삿대질을 하거나, 망연자실하여 앉아 있거나, 아니면 월맹과의 협상안건을 토론했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 때 저 '통신실'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요? 지원병을 보내 달라거나 폭격을 해달라거나 하는 요청이 쇄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전을 받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게 무엇이 있었을까요? 드디어 1975. 4. 30. 오전 11:30, 월맹군 탱크가 대통령궁 정문을 통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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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단상 - 호치민 씨, 당신은 틀렸습니다.>
호치민... 나는 베트남 독립전쟁과 월남전 당시 당신의 생각과 가치관에 대해 확정적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순수했고, 청렴결백했습니다. 당신은 베트남 민족을 위해 숭고한 역사적 사명인 성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혁명 과정에서 흘리는 피는 "어쩔 수 없다"고도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지금 저승에서, 당신은 당신의 일생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요? 아직도 그런 생각인가요?
어쩌면 당신은 "차라리 내가 일찍 죽고, 베트남이 자본주의를 채택하던 월남에 의해 통일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베트남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당신이 사랑해마지 않던 베트남인들은, 어떠한 전쟁이나 대학살이 없이도, 지금은 자유롭고 풍요로우며 활기차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다시 돌아갈 것이라면, 정말이지 뭣 때문에 전쟁을 했고, 뭣 때문에 수 십만 명을 죽여야 했나요? 그렇게 다시 과거의 월남으로 돌아갈 것이라면, 당신의 후계자들이 '도이모이' 정책을 채택하기 전까지 그 수 십년 동안은, 도대체 베트남 국민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기간이었나요?
잘은 모르지만, 아마 1960년대 초만 해도 당신의 베트남은 당시 한국보다 잘 살았거나 한국과 비슷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통일 베트남은 한국자본이 없으면 망할 지경이고, 베트남 여자들은 한국에 시집을 오고, 한국인들은 베트남에 여행가서 왕처럼 행세합니다. 한국인 누구도 과거와 현재의 통일 베트남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진정 순수한 사람이라면 저승에서라도 당신의 과오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베트남인이 '호 아저씨'라고 부르는 당신이라면, 그렇게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당신이 보기 싫어서 당신의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는 당신 동상을 보면서, 당신과 달리 탁월한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을 예지와 투지로 관철시켰던, 당신과 동시대의 인물 이승만과 박정희에게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호치민 씨... 저 세상 어느 허름한 술집에서라도 이승만, 박정희와 만나 술 한 잔 하세요. 그리고 인정하세요. 당신이 틀렸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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