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는 오직 인종청소를 목적으로 유대인만 600만 명을 죽였다. 그들의 금니를 뽑고, 머리카락으로 카펫을 만들고, 기름으로 비누를 만들고, 뼈를 갈아 밭에 뿌렸다. 목적은 오직 하나 유대인 멸종이었다. 전혀 과장 없이 말해서 나치는 유대인을 파리나 모기같은 해충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가능한한 저비용으로 최단시간 내에 멸종시키려고 했다.
유대인 뿐이 아니다. 집시족이나 주변 국가들도 홀로코스트를 피해가지 못했다. 소련을 쳐들어가면서 나치는 동구라파 사람들을 잡아 구덩이를 파게 하고, 그 위에 엎드리게 한 후, 뒤에서 총을 쏘았다. 그리고 다음 줄에 있는 사람들은 반대로 엎드리게 하고, 또 총을 쏘았다. 소위 '정어리통조림' 방식 처형이다.
나치의 반인륜 범죄는 하도 많고 하도 대량으로 자행되어, 몇 백 ~ 몇 천 명이 죽은 것은 관심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2차대전의 참화를 비켜간 것처럼 느껴지는 '리투아니아'에서도 8만명이 단기간에 학살되었다(나도 얼마 전에 다큐를 보고 알았다). 이런걸 보면 조선인에 대한 일제의 만행을 나치의 만행과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위와 같은 반인륜적 범죄는 주로 나치 친위대(SS)의 소행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연합군 병사들은 일반 독일군을 포로로 잡으면 포로대우를 해줬지만, SS를 포로로 잡으면 즉결처형도 많이 했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은 나치를 철저히 반성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반성을 하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독일이 전쟁/침략/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한 것이 아니고, 그 기간 중 벌어진 반인륜 범죄에 대한 사과였다는걸 모른다.
또 많은 사람들은 "독일은 나치를 철저히 청산했는데, 한국은 친일파 청산을 못했기에 민족정기가 흐려졌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이게 이 글의 주제다.
언젠가 2차대전 후 서독 사법기관 고위관료 중 77%가 나치 출신이었다는 충격적인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마침 시간이 나서 구글링을 해 보았다.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사법기관 고위관료 77%가 나치당원이었다면, 다른 정부기관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역사는 단절적인 것이 아니다. 연속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얘기가 길어지므로 생략한다).
다음은 검색한 신문기사를 내가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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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후 서독 사법부 대부분의 관리들은 전 나치였다.]
"More ministry personnel were members of Hitler's party in 1950s than during Third Reich, research shows, allowing colleagues to shield each other from justice"
"50년대 나치당 출신 서독 행정부 공무원 수는 히틀러의 제3제국보다도 많았으며, 그들은 서로를 정의의 심판으로부터 보호했음이 연구결과 밝혀졌다."
베를린 (AFP) - 월요일 발표된 새로운 공식 연구결과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법무부는 자신들의 옛 동료들을 보호하는데 열중했던 전 나치당 출신 동료들로 우글거렸다.
1957년 고위관료 중 무려 77%가 히틀러 나치당원이었으며, 이 수치는 심지어 1933~45년의 제3제국 보다도 높은 비율인 것으로 연구결과 밝혀졌다.
전직 부처 인사파일을 평가한 연구 공동저자인 크리스토프 사펠링은 일간지 '수데치 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수치가 이렇게 높을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파시스트 올드보이 네트워크'는 계급을 폐쇄하여 회원들이 서로를 정의의 심판으로부터 보호하였으며, 왜 감옥에 간 나치전범들이 그렇게 소수였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마아스 헤이코 독일 법무부 장관은 "나치 시대의 변호사들은 오래된 불의를 적발하기 보다는 은폐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 보고서는 부처 관료들만 다뤘지만, 대략 더 넓은 사법 기관의 수치와도 일치한다. 역사학자들은 1950년대 서독의 최고 판사들 중 70퍼센트 이상이 이전 나치와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후회는 없다'
사퍼링은 "나치 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 때, 옛 동료들은, 젊고 부채의식이 없는 외부인들의 조사를 받는 것을 꺼려했다"고 말했다. 다른 정부 부처들은 독일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지만, 사퍼링은 "사법부는 항상 과거를 다룬다"고 말했다.
그 관리들은 홀로코스트 기계에서의 그들의 역할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대개 '무지했다'거나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거나, 그들의 직책에 머물면서 '더 나쁜 범죄를 예방했다'고 주장했다. "당신은 결코 뉘우친다는 말 대신 이유만을 발견할 뿐이다" 라고 사퍼링은 말했다.
구 서독 수도 '본'에 있는 첫 번째 부처 건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로젠버그 프로젝트'는, 그 부처가 전쟁 중 망명했거나 반나치 저항에 가담했던 법학자들을 고용하는데 실패했음을 밝혔다.
2012년 연구를 시작한 사빈 루테써 슈나렌버거 전 법무부 장관은, 1949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170 명의 고위 관료 중 90 명이 나치당원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형을 선고한 홀로코스트 시대의 판사였다고 말했다.
'집단 기억상실증'
이 보고서는 당시 서독의 나치 범죄에 대한 전후 초기의 집단 기억상실증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당시 독일인들은 폐허가 된 나라를 재건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 많은 사람들은, 1945-49 '뉘른베르크' 재판을 "피해자의 정의"로 묵살하면서 과거 범죄에 대해 부정하고 있었다. 이 나라를 점령하고 있는 서방 동맹국들 -미국, 영국, 프랑스- 는 그들이 새 냉전으로 간주했던, 공산주의 동독을 지배한 소련의 위협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상의 요인들과 다른 요인들 때문에, 연합국과 후일의 서독 법원은 나치 당원의 극히 일부인 6,650명의 전 나치스트들에게만 유죄를 판결했다.
판사들은, 피고인들이 주도적으로 행동했거나 비정상적으로 잔인하게 행동한 증거를 포함하는 높은 증거를 요구했기 때문에, 장기 징역형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용의자들은 공범으로 간주되어 가벼운 형을 받았다.
근본적인 변화는 대부분의 전범들이 사망한 후에야 일어났는데, 그것은 오하이오주에서 자동차 공장 노동자가 된 전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존 뎀잔죽의 경우와 함께였다.
2011년 독일 법원은, 그가 개인적으로 연관되었을 범죄 때문이 아니라, 점령된 폴란드의 소비르 수용소의 광범위한 나치 살인기계에서 그가 톱니바퀴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오슈비츠의 부기장'으로 불리는 오스카르 그로닝의 2015년 유죄판결을 포함해 90대 남성들에 대한 획기적인 판결도 잇따랐다. 어떤 사람들은 마침내 홀로코스트의 마지막 가해자들을 법정에 세우는 그러한 재판을 환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들이 너무나 작고 너무나 늦었다고 비난했다.
* 기사 원문 : https://www.timesofisrael.com/most-post-wwii-german-justice-officials-were-ex-nazis-study-fi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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