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한국경제史 3000년 중 근현대 부분

계명산 2019. 3. 23. 17:26

우리는 과거를 역사서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다. 하지만 그런 외눈적 응시는 불완전하다. 우리가 과거를 제대로 보려면, 경제사라는 또 하나의 프리즘이 필요하다. 

과거 특정시점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떤 의식주 환경에서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하루를 살았는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려면, 그들이 살았던 경제적 환경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경제적 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역사서에만 의지해서 과거를 본다면, 그건 실체와 무관한 우리의 일방적 상상이 된다.

이영훈 교수는 경제학자이면서도 역사학자다. 남딜리 과거를 보는 2개의 프리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는 과거를 읽기 위해 한문도 공부했고 누구보다 한문 원전을 많이 본 사람이라는 세평도 있다.

그가 우리나라 3000년 역사의 경제사를 펴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어떤 사람들은 학자로서 참으로 대단한 업적이었다고 칭송한다. 아마 이제서야 우리가 과거 어느 때든 당시의 경제적 환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저술은 "한국경제史 3000년"이라는 제목으로 한국경제신문에 연재되었는데, 그 중에 근현대사 부분을 전재한다. 읽어보면 비로소 조선시대, 구한말, 일제시대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과 환경이 구체적으로 떠오른다.  (출처 :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8122821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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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분산하는 정치

개항 충격파에 휩쓸린 조선…위기 극복의 해법 놓고 사분오열

 

천하에 가난한 정부

18세기 말 조선왕조의 재정은 쌀 200만 석(1석=100L) 규모였다. 일본식으로는 100만 석에 해당한다. 동시대 일본의 영주들이 조세로 수취한 쌀은 1,500만 석이었다. 홋카이도(北海道)를 제외한 일본 국토는 조선의 1.35배, 인구는 2배가량이다.

비교사로 본 조선왕조는 취약한 국가였다. 19세기의 위기는 조선왕조의 재정을 위축시켰다. 1904년 대한제국의 예산은 1421만원(元)으로 1911년 국내총생산의 1∼2%에 지나지 않았다. 대한제국 재정의 실질 규모는 18세기 말의 절반 이하로 줄었다. 제국을 표방했으나 그 나라는 천하에 가난한 정부였다. 

빈약한 재정으로 인해 조선왕조는 군국(軍國)의 주체로 자립하지 못했다. 조선왕조의 군대는 왕실의 수호와 치안의 유지를 위해 구식 병기로 무장하고 왕도 주변에 배치된 70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개항 이전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는 완강했다. 조선왕조는 천자(天子)-제후(諸侯)-대부(大夫)-사(士)-서(庶)의 위계로 편성된 예(禮)의 국제질서를 국가체제의 근본 원리로 했다.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체제이기도 했다. 그 이유로 거의 5세기 동안 부동의 안정성을 구가했다.

조국에 대한 슬픔

1874년 베이징을 방문한 역관(譯官) 오경석 영국 영사관의 서기관 윌리엄 메이어스를 찾았다. 오경석은 세계의 정세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메이어스에게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 오경석은 조국에 대한 자신의 슬픔과 우려를 조심스럽게 피력했다. 

3년 전 강화도를 침공한 미국 군함을 물리친 조선왕조는 쇄국정책에서 더욱 의기양양했다. 대원군은 전국 요처에 “양이(洋夷)와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는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오경석이 보기에 어리석은 짓이었다.

소수의 양반 지배세력은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완강하게 구래(舊來)의 제도와 기득권에 집착했다. 위기를 면할 유일한 방도는 스스로 문호를 열고 열강과 관계를 맺는 길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지배세력을 설득할 방도는 없었다. 그런 말을 입에 담는 순간 목이 달아날 형편이었다.

그래서 오경석은 메이어스에게 영국이 충분한 병력과 군함으로 조선을 찾아와 꽉 닫힌 문호를 열어젖힐 것을 요청했다. 역관은 결코 국가의 대사를 책임질 고위직에 오를 수 없는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 완강한 신분제의 굴레 하에서 조국에 대한 슬픔이 사랑으로 전화(轉化)하는 길은 바깥세상의 도움을 구하는 길뿐이었다.

위정척사

개항은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를 해체하고야 말 일대 충격이었다. 그 미증유의 위기를 당해 제후(諸侯)는 제후대로, 대부(大夫)는 대부대로, 사(士)는 사대로, 서(庶)는 서대로 분산했다. 개항기의 조선 정치사는 이 같은 시각에서야 올바로 조망된다.

영국은 오경석의 소망에 부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일본에 주재한 청의 외교관을 통해 《조선책략》이란 책을 조선에 전했다. 러시아의 남진 위협에 대비해 일본, 미국과 친하게 결탁하라는 내용이었다. 

《조선책략》이 알려지자 조선의 사(士)가 궐기했다. 1881년 영남의 유생 1만 명이 올린 만인소(萬人疏)가 그것이다. 그들은 우리 500년 조종(朝宗)의 문명은 서양의 그것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강원도 유생 홍재학은 위정척사(衛正斥邪), 곧 우리의 올바른 도를 지키고 서양의 사악한 도를 배척하는 것은 우리의 변할 수 없는 정책인데, 임금이 이를 어겨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졌다고 주장했다. 

고종을 비난한 극언은 그의 죽음을 불렀다. 그렇지만 이 나라 선비의 기개는 죽지 않았다. 홍재학의 충간(忠肝)은 뜨겁게 펄떡이며 가슴과 가슴으로 전해졌다. 조선의 사는 제후의 신하이지만 천자의 신하이기도 했다. 그들이 신봉한 정학(正學)은 제후의 권위를 초월했다. 

갑신정변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김옥균박영효 등의 개화당(開化黨)은 오경석을 통해 세계의 정세를 교육받은 문벌 가문의 자제였다. 국가체제의 위기에 대한 응전은 대부(大夫) 위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개화당은 일본의 유신과 같은 변혁을 추구했다.

2년 전 임오군란은 반일 감정의 군중이 일본인을 살해하고 일본공사관을 방화함으로써 일약 국제적 사건으로 비화했다. 일본이 출진 태세를 갖추자 종주국 청은 서둘러 한성에 군대를 진입시켰다. 그리고선 난도에 포위된 국왕을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청은 대원군을 톈진으로 압송했다. 만국공법(萬國公法)의 세계에서 조선은 일거에 청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김옥균 등은 거기에 저항했다. 그들이 준비 부족이었고 성급했다는 비판에는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거사를 일본을 끌어들여서까지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던 벌거벗은 욕망의 정쟁이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들은 외세의 구조로 짜인 조선의 국가체제를 깨고자 했으며, 그 점에서 구래의 정쟁과 결정적으로 달랐다. 그 같은 비판에는 갑신정변을 진압한 청은 외세가 아니고 일본만이 외세라는 시각이 알게 모르게 깔려 있다. 유래가 오랜, 균형 잡히지 못한 시각이다.

유인석과 김백선

갑신정변에서 패퇴한 일본이 조선의 조정을 장악하는 것은 10년 뒤 청일전쟁을 통해서였다. 문벌 출신이라 할 수 없는, 개화 실무에 밝은 친일 관료들이 정권을 잡고선 국가체제의 근대적 개혁을 추진했다.

위정척사의 계승자 유인석은 그에 극렬 반발했다. 그는 우리의 도를 지키는 것 이외의 다른 개화는 있을 수 없다면서 개혁의 취소와 원상회복을 요구했다. 개화파 정부가 단발령을 내리자 그는 고향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휘하에는 상민 신분의 김백선을 대장으로 하는 부대가 있었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실패한 뒤의 일이다. 김백선은 작전에 협력하지 않은 어느 양반 신분의 부대장을 추궁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사령관 유인석은 김백선을 끌어내 참수했다.

유인석이 의병을 일으킨 목적은 예의 국제질서로서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 그 체제에서 사(士)와 서(庶)의 위계는 범할 수 없는 질서였다. 그런데 의병 부대 내에서 그것을 허무는 일이 발생했다. 유인석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패륜이었다.

김백선이 처형되자 유인석의 의병은 뿔뿔이 흩어졌다. 사와 서는 이해관계가 같지 않았다. 사끼리도 그러했다. 충남에선 송씨 가문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자 인근의 윤씨 가문은 외면했다. 당쟁으로 얽힌 원한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수호할 국가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윤리는 효(孝)였다. 종묘사직이 위태롭다고 하나 불효하면서까지 의병에 동참할 수는 없었다.

동학군과 일진회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東學)의 일파가 관리들의 수탈에 저항해 봉기했다. 동학군이 내건 명분은 “충효를 다해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것이었다. 동학농민봉기는 유교적 근왕주의에 입각한 복고적 개혁을 지향했으며, 그 점에서 전래 민란의 계승이자 절정이었다. 종래 동학농민봉기를 급진적 사회개혁의 농민혁명으로 평가한 학설은 역사가들이 관련 소설을 보고 상상한 것이다.

농민군의 봉기는 국제적 사건으로 비화했다. 관군이 동학군을 진압하지 못하자 국왕 부처는 청에 구원을 요청했다. 위험천만한 외교였다. 일본은 청과 전쟁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청군이 출병하자 일본군 역시 출병해 한성을 장악했다. 일본군은 국왕 부처와 대립한 대원군을 집정관으로 옹립했다. 대원군은 동학군 수뇌에게 한성으로 진격해 일본군을 몰아낼 것을 종용했다.

북상하는 농민군과 일본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충돌했다. 농민군 3만6000여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일본군 사망자는 단 1명이었다. 부적을 달면 총알을 피할 수 있다는 비기의 정신세계와 신식병기의 근대문명이 부딪힌,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가 없는 참극이었다.

동학의 잔당은 교주 손병희의 인도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일진회(一進會)로 재편됐다. 한국사 최초로 맨 아래 위계의 서민이 이룩한 정치적 결사였다. 이후 일진회가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의 합방을 청원한 것은 개항기의 분산하는 정치가 빚은 최대의 아이러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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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황혼의 대한제국

나라를 개인재산 취급한 고종…화폐 마구 찍어내 인플레 불 질러

 

家産國家로의 변질

국가체제의 위기에 대응해 조선 국왕은 국가의 가산화(家産化)를 추구했다. 국왕 고종의 이 같은 대응 방식은 개항기 각 위계가 분산하는 정치의 모범을 이뤘다. 1882년 당오전(當五錢)의 발행 그 출발이었다. 액면가치는 5배지만 실질가치는 2배에 불과한 악화(惡貨)였다. 당오전 발행은 집권세력의 중심인 민(閔) 왕후와 그의 친족이 주도했다.

여러 곳에서 주조된 당오전의 상당 부분은 왕실 창고로 옮겨져 궁궐 살림살이의 경로로 유통됐다. 종래 동전의 주조와 유통은 빈민 구제와 같은 공적 용도로 엄격하게 관리됐다. 그러던 성리학적 공공국가가 당오전 발행을 계기로 왕실의 가산국가로 변질했다. 조선왕조의 관료제는 그토록 취약했던가. 연구자들은 아직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

1882년까지 전국의 동전 유통액은 2000만냥이었다. 그에 비해 1894년까지 발행된 당오전은 5000만냥이나 됐다. 통화량 팽창으로 물가가 8배나 급등했다. 전국 시장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국왕 부처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같은 기간 왕실재정의 실질 규모는 3배나 커졌다.

민 왕후는 늘어난 수입의 대부분을 다례, 고사, 사찬(賜饌)에 탕진했다. 그는 왕실의 안녕을 빌기 위해 궁중에 신당(神堂)을 짓고 무당을 불러들여 굿판을 벌였다. 1893년 한 해에만 29회의 다례와 고사가 행해졌다. 궁녀를 파견해 전국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는 야사는 사실 그대로였다. 

새로운 종주국을 찾아서

고종은 그의 나라를 부강한 독립국으로 만들기 위해 그의 신료와 협력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그들이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탐한다며 경계했다. 그런 의심에서 그는 누구도 신임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을 맡기고선 책임을 전가하는 뒤통수치기 전술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고종이 그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추구한 책략은 그를 보호할 새로운 종주국을 찾는 것이었다.

1884년 러시아와 수교한 뒤 고종은 러시아 황제에게 자신을 보호해 줄 것과 양국이 5만 명의 연합군을 결성할 것을 요청했다. 종주국 청의 점증하는 간섭을 물리치기 위해서였다. 독일이 외교고문 묄렌도르프를 사주해 벌인 공작이었다. 그러자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했다. 청은 묄렌도르프를 소환하고 위안스카이(袁世凱)를 파견했다.

1886년 고종은 다시 러시아에 접근해 군함 파견을 요청했다. 그러자 그가 가장 신임하는 민영익이 그 사실을 청에 밀고했다. 그러고선 홍콩으로 도망쳤다. 고종은 청에 의해 폐위될 위기에까지 몰렸다. 제후와 대부가 다른 방향으로 분산하는 조선 정치의 한 장면이었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청·일전쟁으로 종주국 청이 일본에 의해 쫓겨났다. 그러자 러시아가 간섭했다. 일본은 눈물을 머금고 청에서 할양받은 요동반도를 반환했다. 역시 러시아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강한 나라였다.

국왕 부처는 다시 러시아에 접근했다. 러시아가 미소로 응답하자 한성에 거주하던 일본 낭인 20여 명이 미명에 궁중을 습격해 민 왕후를 무참하게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을미사변). 러시아와 일본의 예선전과 다를 바 없는 사건이었다. 몇 달 뒤 고종은 궁중을 탈출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아관파천).

그러고선 근위대를 보내 일본의 지원으로 집권한 내각 중신들을 난자했다. 총리 김홍집의 벌거벗겨진 시신은 청계천변에 사흘이나 방치됐다. 다시 한 번 처절하게 분산하는 조선 정치의 한 장면이었다.

황제로 등극하다

1896년 5월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이 모스크바에서 거행됐다. 고종은 축하사절을 파견해 보호를 요청하는 친서를 전했다.

"일본은 섬나라로서 제도와 문자를 짐의 나라가 가르쳤다. 이로 인해 일본은 짐의 나라를 주인의 나라로 섬겼다. 그 일본이 서양 제도를 배워 동양의 맹주가 되려고 짐의 나라에 불법 행위를 하고 있다. 눈물로 폐하께 호소하니 일본을 꾸짖어 우리의 독립을 침해하지 못하게 해주시옵소서."

친서의 요지다. 이에 답해 니콜라이 2세는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파견했다. 고종은 러시아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그러고선 1897년 10월 황제로 등극했다. 새로운 국호는 대한국(大韓國)이었다. 고대의 마한, 진한, 변한을 통합한 큰 왕국이란 뜻이었다. 고종은 자신의 칭제(稱帝)가 바닷속 야만국 일본과 개혁파 정치세력으로부터 자신의 보위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다.

그의 일본 인식은 종족주의적 적대 감정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왕국에 걸린 열강의 이해관계가 어떤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의 나라가 독립국으로 존대받기 위해서 그와 신민이 무슨 개혁을 함께 이뤄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만세불변의 전제정치

1898년 10월,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 정부 최고위 관료들이 참석했다. 그들은 외국과의 조약 체결에는 각부 대신과 중추원(中樞院) 의장이 합동으로 날인해야 한다는 조항을 포함한 6개 조의 개혁안을 결의했다. 황제는 이를 재가했다. 대한제국의 앞날은 밝아 보였다. 그렇지만 나흘 뒤 황제는 독립협회 간부를 구속하고 협회를 해산했다.

체포를 면한 윤치호 회장은 일기에다 “이 사람이 국왕이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어떤 배신자도 대한의 황제보다 더 천박하지는 않을 것이다”고 탄식했다.

나라의 주권을 안전하게 분산 배치해 두자는 신민의 요구를 물리친 황제는 1903년까지 마지막 태평세월을 누렸다. 동기간 ‘자유’라는 단어는 공사의 언론에서 자취를 감췄다.

1899년 8월, 황제는 그의 나라가 어떤 정치체제인지를 규정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반포했다. 동 국제는 대한국은 만세불변의 전제정치이며, 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향유한다고 선언했다. 외국과의 조약 체결도 황제의 무한한 권리에 속했다. 
동 국제는 6년 뒤 일본이 그 황제로부터 외교 권리를 박탈하는 조약을 강요할 때 누구도 그에 간섭하거나 비준할 여지를 차단했다. 대한제국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

황실 재정의 민낯
 

국제 반포에 이어 정부가 이에 상응하는 형태로 개편됐다.

황제 직속 원수부가 설치돼 중앙과 지방 군대를 지휘했다. 정부 중요 기구로서 화폐를 주조하는 전환국 등이 황제 개인의 기구로 옮겨졌다. 인삼 전매권, 광세, 염세, 어세 등의 정부 재원이 황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內藏院)으로 편입됐다. 농상공부가 관리한 전국의 역토, 둔토, 목장토 등의 공유지가 황제 개인의 재산으로 바뀌었다. 전환국이 발행한 백동화(白銅貨)는 황실 재정의 가장 큰 수입원을 이뤘다.

1901~1904년에 걸쳐 해마다 300만원(元) 이상의 백동화가 남발돼 격심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1원=옛 10냥). 용산의 전환국에서 주조된 백동화는 매번 20여 명의 지게꾼이 경운궁 내 별고(別庫), 곧 황제의 창고로 옮겼다. 1899년 황제는 자신이 최대주주인 천일은행(天一銀行)을 설립했다. 현재 우리은행의 최초 전신이다.

전환국의 백동화가 무슨 이유로 이 은행 금고로 옮겨지지 않았는지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적지 않은 이자 수입이 따르는데도 말이다. 순검의 호위를 받으며 지게꾼들이 동전을 지고 가는 행렬을 상상해 보라. 그것만큼 대한제국의 정체를 잘 드러내는 장면은 없을 것이다. 

별고의 다른 큰 수입원은 매관매직이었다. 황제는 감사와 수령의 외직을 값을 붙여 팔았다. 고종의 매관매직은 1880년대부터였으며, 황제의 전제권이 확립된 1899년 이후 전성기를 이뤘다. 백동화 주조와 매관매직으로 벌어들인 황제의 수입이 얼마였는지는 추정하기 어렵다.

별고에 쌓인 황제의 현금자산은 황실의 사치, 빈번한 제사와 진찬, 전각 신축, 환관과 나인 등 수많은 궁속의 월료(月料)로 허비됐다. 인삼 전매 자금과 쌀장사의 밑천으로 투입되기도 했다. 심복 이용익이 그 대리인이었다.

고종 황제가 개명군주로서 전제권력을 활용해 부국강병을 추구했다는 학계 일각의 평가는 그 시대가 남긴 방대한 재정 기록에서 단 한 조각의 근거도 찾기 힘든 황당설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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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병합의 길

한일병합은 日·러·美·英 동조의 결과물…고종의 無知도 패망 재촉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일본 특사는 러시아 외상에게 조선의 39도선을 경계로 양국의 충돌을 방지하는 완충지대를 설정하자고 제안했다. 러시아는 일본의 제안을 거절하고 장차 필요에 따라 양국이 조선을 공동 점거하자는 협정을 성립시켰다(야마가타·로마노프협정).

이 불안정한 약속은 러시아가 조선의 요청에 따라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파견함으로써 깨지고 말았다. 러시아는 부산 절영도를 러시아 해군의 저탄(貯炭) 기지로 조차하려고 하는 등 조선 진출에 박차를 가했다.

러시아의 외교는 일관성이 없었다. 황제의 변덕이 지배하는 전제국가이기 때문이었다. 1897년 12월 러시아는 돌연 요동반도의 뤼순(旅順)항을 점령했다. 그에 맞서 영국, 미국, 일본이 연대할 조짐을 보이자 러시아는 조선에서 철수해 만주에 집중하는 방침으로 돌아섰다.

1898년 4월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조선에 관한 협정이 성립했다(니시·로젠협정). 러시아는 조선이 일본의 세력권에 있음을 승인했으며, 일본은 러시아의 요동반도 경영을 묵인했다. 이후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이 조선에서 철수했다(이하 조선을 한국으로 부름). 

허망한 중립론

러시아의 보호에 안도하던 고종은 1899년 한국의 중립화를 미국과 일본에 제안했다. 미국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나라가 중립국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전쟁을 하는 다른 나라가 자국의 영토에서 군수를 조달하거나 군병을 모집하거나 군기를 제작하는 것을 방지하는 능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고종은 만국공법의 세계에서 중립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일본 외상은 찾아온 한국 특사에게 나라의 실력부터 기르라고 충고했다. 그 사이 일본은 임박한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함대를 건설했다.

1900년 베이징에서 의화단 사건이 발생했다. 연합국의 일원으로 출병한 러시아는 동청철도의 보호를 명분으로 만주 일원을 점령했다. 그에 대응해 1902년 일본과 영국이 동맹을 맺었다. 러시아는 남만주 봉천과 길림 일대의 점령을 강화했다. 나아가 1903년 4월 한국으로부터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조차한 다음 1개 여단을 주둔시켰다.
 

일본과 러시아는 전쟁을 피하기 위한 마지막 교섭을 벌였다. 러시아는 한국의 39도선 이북을 양국의 중립지대로 설정하자고 제안했으나 이번에는 일본이 거절했다.

전쟁이 임박하자 고종은 다시 중립을 선언했다. 그에 대해 일본 언론은 한국은 전쟁과 무관한 제3자가 아니라 전쟁의 목적물 자체며, 이에 러시아에 협력하든지 일본에 협력하든지 양자택일하라고 요구했다. 국제사회는 중립의 능력이 없는 나라가 선포한 중립을 일종의 골계(滑稽)로 받아들였다.

그 무렵 미국의 한국 방침이 정해졌다. 미국 지도자들은 한국은 황제와 조정의 반목으로 독립을 유지할 능력이 없으며, 차라리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좋으며, 그편이 악정(惡政)에 시달리는 한국 인민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러일전쟁

1904년 2월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에 돌입했다. 고종은 전세가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그해 11월까지도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는 무당의 말에 안심하고 있었다. 주한 영국 총영사는 그 무렵 고종에 대해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는 가운데 정치적으로 망상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본국 정부에 보고했다.

1905년 7월 미국은 일본과의 비밀회담에서 일본이 필리핀에 대해 어떤 야심도 없음을 표명하는 대신에 일본이 한국에서 지도적 지위를 지님을 인정하는 각서를 교환했다(가쓰라·태프트각서). 동년 8월 영국은 일본과의 동맹을 연장하면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도, 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승인했다(제2차 영·일동맹).

동년 10월 미국의 주선으로 포츠머스에서 일본과 러시아 간 강화조약이 성립했다(포츠머스강화조약). 거기서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 정치, 경제, 군사상의 탁월한 이익을 가지며 한국을 지도, 감리, 보호할 권리를 지님을 인정했다.

보호국으로 떨어지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1905년 11월 일본의 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고종을 알현하면서 그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길 것을 요구했다. 황제는 내용이야 어떻든 외교권의 형식만은 보존해주길 애처롭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황제는 일본이 제시한 조약안을 타결하도록 그의 대신에게 명했다. 협상 과정에서 일본은 어떤 경우에도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보증하며, 통감의 권한은 외교에 한하며, 한국이 부강의 실력을 회복하면 외교권을 반환한다는 취지의 조항이 추가됐다. 이로써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하는 양국 간 조약이 성립했다(제2차 한일협약, 세칭 을사조약).

1906년 2월 한국의 외교권을 행사하고 내정을 감독할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가 자청해 부임했다. 한국에 주둔한 각국 외교부는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영사관만 남기고 철수했다.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은 일본이 처음부터 1910년의 병합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정계 여론은 한국을 부속 영토로 병합해야 한다는 급진적 주장부터 종속국, 자치식민지, 위임통치로 지배해야 한다는 점진적 주장까지 여러 가지 구상으로 얽혀 있었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 병합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태세였다.
 

이토는 1000년 이상 독자의 국가를 영위해온 이민족이 일본에 동화될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한국이 일본에 실질적인 병합과 다를 바 없는 종속국으로 포섭된 가운데 국가 체제를 근대적으로 개혁해 자치 능력을 높이는 길이야말로 일본의 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취지에서 이토는 통감으로 재임한 3년간 화폐·금융·재정 개혁을 행하고, 사법제도를 정비하고, 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식산흥업을 추진하는 등 이른바 자치육성정책을 펼쳤다. 

그의 정책은 적절한 협력자를 구하지 못하는 가운데 좌절됐다. 한국 정부는 이토의 정책에 협력하는 것이 형식적이나마 주권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 일파와 황제의 존재를 부정하고 일본으로의 편입을 주장하는 일파로 분열했다. 

1907년 7월의 헤이그밀사 사건은 한국을 명목이나마 유지해두려는 이토 통감을 비롯한 온건파의 입장을 약화시켰다. 동 사건은 고종 황제의 퇴위와 각부 차관의 일본인 임용을 규정한 제3차 한일협약의 체결로 수습됐다.

이번에는 조정의 대신들이 황제를 배반했다. 그들은 일본의 압박에 침묵하거나 고종을 군신 간 의리를 저버린 군왕이라고 규탄하면서 퇴위를 요구했다.

병합
 

더 이상의 실험과 주저를 허용하지 않은 것은 급박하게 돌아간 만주의 정세였다. 일본의 만주 이권을 승인해온 미국이 만주 문제에 개입할 태세를 보였다. 미국은 만주철도의 중립화를 일본, 러시아, 영국에 제안했다. 미국의 진출을 원치 않는 러시아와 일본은 서둘러 만주의 이권을 분할하는 협상에 들어갔다(제2차 러·일협약). 

그 과정에서 1910년 4월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 병합을 승인했다. 동년 5월에는 영국이 이를 추인했다. 오늘날 한국인 일반의 통념과 달리 조선왕조의 패망은 철저하게 일본, 러시아, 미국, 영국 간의 국제적 동조로 이뤄졌다.

1910년 7월 새로 부임한 통감은 한국을 병합하라는 명을 받고 있었다. 황제의 신하들은 국호를 보존하고 황실이 왕호를 사용함을 병합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일본이 이를 수락해 국호는 ‘조선’으로, 왕호는 ‘이왕(李王)’으로 정해졌다.

1910년 8월 순종 황제는 그의 한국 통치를 일본 황제에게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양여하는 조칙을 발표했다. 뒤이어 양국 간 병합조약이 맺어졌다. 그 과정 및 내용은 황제가 그의 가산을 재량으로 처분하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일본 황제는 한국 황제와 그의 일족을 일본 황족(皇族)에 준하는 왕공족(王公族)으로 대우하고, 매년 옛 황실재정에 준하는 규모의 세비를 지급했다. 1926년 순종, 즉 제1대 이왕이 사망하자 일본에 체류하던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이 제2대 이왕에 즉위했다. 열성조에 올리는 종묘사직의 제사도 1945년 8월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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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홉스적 자연상태

500년 '위계 지배' 조선…국가 붕괴 후 사회구성체계·윤리 '산산조각'

 

단체의 결여

1899∼1904년 대한제국은 전국의 논, 밭, 대지를 조사했다. 1912∼1918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토지를 조사했다. 두 조사로 작성된 두 종류의 토지대장은 20세기 초 한국 사회의 조직 실태와 원리에 관한 정보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각종 지목의 토지는 대부분 개인 명의의 소유였다. 2인 이상 공유나 단체 소유는 거의 없었다. 굳이 그 비중을 밝히자면 1∼2%에 불과했다. 필자가 토지대장을 열람한 적이 없는 오늘날 북한 지역도 그랬는지는 단언하기 힘들다. 그것은 장래의 연구과제다. 그런 유보 위에서 20세기 초의 한국 사회는 일반적으로 단체를 결여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나마 있던 단체로서 가장 보편적인 것은 문중 또는 족계(族契)로 결속한 친족집단이었다. 그들은 제사 비용을 조달할 목적에서 공동의 토지를 보유했으나 그 크기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도 그 권리가 친족집단의 공유 또는 총유라기보다 종손 개인에게 귀속하는 토지였다.

향교와 서원의 토지가 곳곳에 분포했다. 하지만 향교와 서원은 전통 신분질서에 기초한 공공기관으로, 개인의 자발적 결사라 하기는 힘들었다. 19세기 중엽부터 상인 단체가 여러 지방에서 결성됐으나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그것도 상부상조를 위한 인적 결합이었지 공동사업을 위한 자본 결합은 아니었다. 수공업자의 단체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작아진 동리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고 여럿이 모여 살 수밖에 없다. 그래야 도적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도로·교량·저수지 등 공동 노동을 요하는 여러 형태의 공공재를 생산할 수 있다.

동리는 함께 모여 삶으로써 발생하는 ‘이웃효과’의 기초 단위다. 동리의 주민이 어떤 원리로 얼마의 이웃효과를 창출하고 배분하는가는 한 사회의 조직적 특질을 결정하는 가장 긴요한 문제다. 1910년께 동리의 총수는 6만4000개였다. 전국의 호수가 대략 320만이었으니 동리의 규모는 평균 50호였다. 이웃 나라에 비해 3분의 1 이하의 소규모였다.

18세기 말 전국의 동리는 총 3만9000개였다. 인구는 1910년과 비슷하거나 조금 많았다. 19세기에 걸쳐 동리의 인구 규모는 절반으로 줄었다. 동리가 둘로 쪼개지는 분동(分洞) 현상이 전국적으로 광범하게 일었기 때문이다. 군포(軍布)를 비롯한 부세의 분배를 둘러싼 신분 간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양반 신분이 지배하는 반촌(班村)에서는 상민들이 이탈해 독자의 동리를 꾸렸다. 세력이 비등한 양반 가문 간 다툼도 분동의 원인이었다. 상민끼리 사는 민촌(民村)에 양반 신분이 침투하면 그것도 분동을 야기했다.

대한제국이 조사한 토지대장에서 동리는 인간들이 집주한 공간을 의미했다. 동리와 동리 사이에는 경계가 없었다. 동리 사이에 놓인 들판이나 산지는 어느 동리에도 속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전통시대의 동리는 주민, 경지, 산림, 수리의 구조적 결합이 아니었다. 그런 동리가 창출되는 것은 1910년대 총독부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과 지방행정제도 개편에 의해서였다.

동리가 생산하는 이웃효과의 종류와 크기는 제한적이었다. 동리의 규모가 작았을 뿐 아니라 순수한 인적 결합이라는 조직의 특질 때문이었다. 동리의 공공기능은 부세를 공동 납부하거나 농번기에 노동을 상호 교환하는 품앗이 수준에 머물렀다.

계의 결성

전통시대의 한국인들은 수리, 영림, 교육, 상호부조 등의 공공재를 위해 계를 결성했다. 보계(洑契), 송계(松契), 서당계(書堂契), 혼상계(婚喪契) 등이 그것이다. 계의 결성은 단일 목적을 위해 동일 신분 간에 이뤄지는 게 보통이었다. 동리의 규모가 점점 작아져 각종 계의 결성은 동리의 범위를 초월했다.

계의 체결이 얼마나 보편적이었는지는 1926년에야 조사가 이뤄졌다. 그에 의하면 계의 가입자는 전국적으로 43만 명으로 동년의 호 총수의 12%였다. 총독부 치하에서 계의 수가 감소했을 수 있는데, 이를 감안하더라도 계의 결성은 보편적이지 않았다.

요컨대 20세기 초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고독했다. 그들의 사회생활을 감싸는 단체나 기구의 밀도는 희박했다. 전통 농업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개별주의가 이상하게도 팽배한 사회였다. 5세기에 걸쳐 개별 인신에 신역(身役)을 차등 부과해온 조선왕조의 백성 지배체제가 남긴 역사적 유산이었다.

초라한 광공업

1907년 전국에 분포한 근대적 형태의 공장은 70개였다. 그 가운데 한국인 소유의 공장은 7개에 불과한데, 대부분 1900년 이후 한성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그 가운데 공장의 내실을 갖춘 것은 정미소 1개와 직물공장 1개뿐이었다. 나머지는 약간의 종업원을 고용한 인쇄소, 제지소, 표구점, 유기점 등이었다. 1907년 착수된 직업 조사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광공업에 종사한 호는 총 호수의 0.9%에 불과했다.

통감부와 총독부가 남긴 각종 통계로부터 오늘날 기준의 산업별 국내총생산과 1인당 소득을 추계할 수 있다. 1911년 국내총생산에서 가내공업을 포함한 2차 산업 광공업이 차지한 비중은 5%에 불과했다. 1인당 소득은 그것이 알려진 세계 40개국 가운데 최하위였다.

황혼의 대한제국은 그를 위한 조종이 울려 퍼질 때 더없이 빈약한 산업구조를 남겼다. 그 역시 5세기에 걸친 개별 인신에 대한 지배체제가 남긴 역사적 유산이었다.

각축하는 인간들

더없이 가난하고, 반상(班常)으로 대립하고, 단체를 결여하고, 개별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인간들은 살아남기 위해 각축했다. 그 시대가 남긴 기록에는 서로 부딪혀 아파하는 인간들의 비명과 신음이 가득하다. 다음은 1897년 6월10일자 ‘독립신문’에 실린 한 기사의 요지이다.

"세계에서 제일 불쌍한 백성은 조선의 백성이다. 남의 나라 백성은 법률이 소상하고 학문이 진보하여 자기 힘과 재주로 벌어먹고 신상의 자유권이 있어 자기 직분만 다하면 누구에 천대를 받을 일도 없다. 조선에선 법률도 없고 학문도 없어 벌어먹을 도리가 두 가지밖에 없다. 한 가지는 농사를 하든지 짐을 지든지 하여 겨우 연명하는 것이요, 다른 한 가지는 벼슬을 하든지 벼슬하는 사람에 의지하여 농사하고 짐 지는 사람들을 뜯어 먹는 것이다.

전국의 형세가 서로 돕고 사랑하는 기미는 없고 서로 해하고 잡아먹으려는 기색만 가득하여 큰 고기는 중간 고기를 먹고 중간 고기는 작은 고기를 먹고 작은 고기는 송사리를 먹는다. 그런 중에 사람들이 괴상한 등분(等分)과 당색(黨色)으로 나뉘어 서로 박대하고 서럽게 구니 어찌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홉스적 자연상태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1588∼1679)는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의 자연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곳에서는 근면할 이유가 없다. 그 과실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땅을 경작하는 일도, 재화를 수입하는 항해도 없다. 예술도 글자도 사회도 필요 없다. 계속되는 공포와 폭력적 죽음의 위험만이 있을 뿐이다. 그곳에서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야비하고 폭력적이다.”

이 같은 야만의 자연상태는 홉스에 의하면 한 손에 칼을, 다른 한 손에 교회를 움켜쥔 리바이어던, 곧 국가의 출현으로 구원됐다.

최정운 서울대 교수는 그의 역저 《한국인의 탄생》(미지북스, 2013)에서 20세기 초의 한국을 위와 같은 ‘홉스적 자연상태’로 규정했다. 그가 해부한 여러 신소설에서 국가권력은 도적으로 변해 있었고, 사회윤리는 산산조각 난 상태였다.

그는 물었다. “인간이 사는 사회가 왜, 그리고 어떻게 자연상태로 분해될 수 있을까.” 조선왕조가 망한 지 100년 만에 제기된 지성의 물음이다. 국가만 패망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해체된 것이다.

필자는 이 연재를 통해 최정운 교수의 물음에 나름의 대답을 모색해 왔다.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는 지배와 동의의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은, 천자를 정점으로 한 제후-대부-사-서의 국제적 위계였다고 말이다. 개항기에 들어 그 국가체제가 해체되니 각 위계에 놓인 구성 분자들이 바닥으로 와락 쏟아졌다. ‘쟁반 위의 모래알’과 같은 20세기 한국사회의 특질은 그렇게 형성됐다. 이 사회는 어떻게 소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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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근대의 이식

조선의 완전한 동화 노린 日帝…시장기구·사유재산제도 이식

동화와 차별

‘한국경제사 3000년’의 시간 여행은 지금부터 1910년대 이래의 현대사에 진입한다. 조선을 부속 영토로 병합한 일제는 조선의 완전하고 영구한 동화(同化)를 지향했다. 1919년 조선 총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과 일본 관계는 열강과 그 식민지 관계와 다르다. 혼연융화(渾然融和)해 그 결합을 굳게 하는 것은 실로 제국의 존재 요건이다. 그들에겐 수천 년의 역사와 전통적 민족성이 있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동화해 버리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고로 통치의 방침은 동화주의지만 점진주의에 따를 필요가 있다.”

점진주의, 그것은 뒤집어 말하면 차별주의였다. 일제는 조선인의 정치적 능력을 차별했다. 반면 경제 면에서는 비교적 급속한 동화를 추구했다. 이에 따라 일제하 조선 경제는 적지 않은 변화를 경험했다. 그것은 세계사 맥락에서 ‘근대’의 이식이었다.

민법의 세계

1912년 총독부는 조선의 민사에 관해서는 일본에서 시행 중인 민법, 상법, 민사소송법 등 23개 법률을 의용(依用)한다는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발포했다.

1897년 일본은 프랑스와 독일 등의 민법을 참조해 자국의 민법을 제정했다. 서유럽에서 발흥한 근대문명에서 인간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사권(私權)’의 주체다. 민법은 ‘소유권 절대의 원칙’ ‘계약 자유의 원칙’ ‘손해 배상의 원칙’을 통해 개인의 ‘사권’을 보장한다.

조선민사령 발포로 조선에 거주하는 모든 인간은 ‘사권’ 또는 ‘사적 자치’의 주체로 탈바꿈했다. 그것은 형식적인 변화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선인의 삶과 상호관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인도 점차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으로 성숙했다.

호주제 가족
 

민법의 세계에서 개인은 천연의 혈연공동체인 가족 일원으로 존재한다. 민법의 절반은 가족과 개인 관계에 관한 규정이다. 조선에 이식된 일본 민법에서 가족은 ‘호주의 가(家)에 있는 배우자 및 친족’으로 정의됐다. 호주는 가족원의 부양을 책임짐과 동시에 그 구성과 지위의 변동을 결정할 권리를 보유했다. 

가족은 호주의 권리가 그의 상속자에게 승계되는 법적 단위였다. 호에는 그의 법적 주소로서 본적(本籍)이 붙었다. 같은 집에 살더라도 본적을 공유하지 않으면 가족이 아니며, 멀리 떨어져 살아도 본적을 공유하면 가족이었다. 이런 개념의 호주제 가족은 19세기까지 조선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인간을 호주제 가족의 일원으로 등록하는 작업은 1909년부터였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호적을 이전 시대의 호적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은 특질이 두드러진다.

첫째, 모든 인간이 호적에 등록됐다. 이전 시대에는 전 인구의 3분의 1가량인 하층민은 호적에 등록되지 않았다. 둘째, 인간의 사회적 지위를 차별하는 신분에 관한 표기가 일절 사라졌다. 새로운 호적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했다. 셋째, 여성이 이름을 갖게 됐다. 이전 시대 여성은 독립의 사회적 인격이 아니어서 이름이 없었다.

사유재산제도

사권의 기초가 되는 재산권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공부(公簿)에 등록돼야 했다. 등록되지 않은 재산권은 보호 대상이 아니었다. 이를 위해 총독부는 등기제도를 시행했다.

토지, 임야, 광산, 어장 등의 물적 재산권은 토지조사령, 삼림령, 광업령, 어업령을 발포해 소유자와 권리의 실태를 조사했다. 특허권, 의장권, 상표권, 저작권 등의 무체(無體) 재산권도 각각의 단행법을 통해 그 권리와 연한이 규정됐다.

1910년대를 통해 총독부는 포괄적 범위의 사유재산제도를 확립했다. 이미 건너온 일본인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한 취지였다. 그렇지만 조선인의 재산권도 법률의 보편주의에 따라 창출되고 보호됐다.

사유재산제도는 시장경제체제의 가장 중요한 토대를 이룬다. 사유재산권의 성립은 거래의 불확실성에 기인하는 비용을 절감함으로써 거래의 대규모화, 장기화, 신용화를 촉진한다. 사유재산권 확립은 수익의 귀속을 명확히 함으로써 기술과 조직의 혁신을 위한 투자를 촉진한다. 법률에 의한 재산권의 엄밀한 정의와 다양한 속성의 구분은 자본의 결합, 유동, 축적을 촉진한다.

그런 사유재산제도가 일정(日政) 초기에 민법과 여타 단행법의 의용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고스란히 이식됐다. 그 토대에서 조선 경제의 ‘근대적 성장’이 개시됐다.

토지조사사업

1912∼1918년에 걸친 ‘토지조사사업’은 총독부 일반 행정의 기초로 전, 답, 대지, 임야, 도로, 구거(溝渠·인공적인 수로 또는 그 부지), 유지(溜池), 하천, 제방, 분묘, 기타 잡종지의 소유권, 면적, 등급, 지가를 조사하는 일대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 전국에 대소 삼각점이 설치되고 과학적 측량으로 각종 토지의 면적, 지반(地盤), 표고가 조사됐다. 그 성과로 제작된 토지대장과 지적도는 지금껏 이 나라 토지 행정의 기초로 긴요하게 활용 중이다.

사업 과정에서 인구, 경지, 산천, 도로의 객관적 지표가 명확해지자 그에 준해 행정구역을 합리적으로 재편하는 작업이 병행됐다. 그 결과 종래의 317개 군이 220개 군으로, 4336개 면이 2522개 면으로, 6만3000여 동리가 2만7000여 동리로 통폐합됐다. 아울러 동리에 속한 모든 필지에 번지가 부여돼 인간과 토지의 법적 소재가 명확해졌다.

토지 소유권은 신고 방식으로 조사됐다. 그래도 큰 혼란이 없을 만큼 토지의 사적 소유가 높은 수준으로 성립해 있었기 때문이다. 신고는 정해진 기한에 99.95%의 완전도를 보였다. 토지조사반이 도착하면 소유자는 이장 및 이웃과 함께 자기 토지에 입회해 당자임을 확인받았다. 소유자가 둘 이상이면 분쟁지로 접수돼 별도 심사 과정을 거쳤다. 소유권이 1차 사정되면 그 결과를 일정 기간 공시해 불복 신청을 받았다.

분쟁지에 대한 총독부 심사와 판정은 문서주의에 입각해 객관적으로 이뤄졌다. 그 결과 전, 답, 대지 등 총 487만여㏊ 가운데 12만여㏊가 국유지로 결정됐다. 국유지의 대부분은 1924년까지 조선인 소작농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불하됐다. 총독부는 새롭게 사정한 지가의 1.3%를 지세로 부과했는데, 당시 일본 농민이 그의 정부에 부담한 지세의 절반 정도였다.

시장기구와 사회간접자본

시장경제는 은행, 조합, 회사, 거래소, 도·소매업, 신탁업, 운송업, 창고업, 보험업, 직업소개소 등 재화와 서비스의 흐름을 중개하는 수많은 시장기구의 유기적 결합이다. 일정기에 걸쳐 각종 시장기구가 이식돼 토착 문화에 적합한 형태로 정착했다.


1907년 설립된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은 1912년 조선은행으로 재편됐다. 조선은행은 일본은행권과 그에 준하는 채권을 준비금(準備金)으로 해 조선은행권을 발행했다. 조선은행권은 일본은행권과 등가였다. 이외에 민간의 대부업이 은행으로 승격해 1912년 21개 시중은행이 활동했다.

회사는 초기엔 회사령에 따라 그 설립이 자유롭지 않아 1918년에도 266개에 불과했다. 1920년 회사령이 폐지되자 1939년까지 그 수가 5600여 개로 늘었다. 1920년에는 경성주식현물거래소가 설치돼 민간에서 자생한 수출상품거래와 주식거래를 제도화했다.

각종 시장기구의 이식과 더불어 철도, 도로, 항만, 통신의 사회간접자본이 축설됐다. 1912년까지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호남선이 개통돼 한반도를 종관(縱貫)하는 철도망이 완성됐다. 철도는 1945년까지 주요 7개 선이 추가로 개통돼 총연장이 4000㎞를 넘었다. 각 철도의 종점을 이루는 항구에는 항만 시설이 증축돼 철도운수와 기선운수의 연락을 강화했다.

도로는 1937년까지 2만7000㎞가 개설됐다. 양측에 측구(側溝)가 설치되고 가로수가 심어진 1, 2등 도로를 가리켜 조선인은 신작로(新作路)라 불렀다. 도로를 달린 각종 자동차는 1911년만 해도 2대에 불과했는데 1935년까지 7130대로 늘었다. 우편·전신을 취급한 통신기관은 1905년 512개에서 1940년 1246개로 확장됐다.

철도, 도로, 항만, 통신의 축설로 전국이 단일 시장으로 통합됐다. 1910년 16개 주요 도시 쌀값은 평균 20% 차이를 보였다. 그것이 1938년까지 3∼4%로 축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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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근대화의 물결

日 주도 하에 경제 성장했지만…소득 상위 10%는 온통 일본인

인구 증가

1925년 최초의 국세조사(國勢調査)가 행해졌다. 이에 따르면 당시 조선의 총인구는 일본인과 외국인을 포함해 1,827만 명이었다. 이는 1940년까지 2,430만 명으로 증가했다. 1910년의 인구는 몇 가지 추계가 있는데, 가장 믿을 만한 수치는 1,633만 명이다. 일본인과 외국인 수는 1910년 18만 명에서 1940년 75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들을 제외한 조선인은 1910년 1,615만 명에서 1940년 2,355만 명으로 46% 증가했다.

일본과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이 있는데, 각각 184만 명과 103만 명이었다. 이를 더한 1940년 조선인 총수는 1910년에 비해 64% 증가했다. 가히 폭발적인 증가였다.

보건과 위생의 개선이 주요 원인이었다. 총독부는 전염병 예방과 질병 퇴치를 위한 보건·위생제도를 효과적으로 구축했다. 경제성장에 따라 영양상태가 개선된 것도 다른 한편의 원인이었다.

도시의 발달

도시, 곧 부(府)의 수는 1925년 12개에서 1940년 20개로 증가했다. 조선왕조의 수도 한성부(漢城府)는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됐다. 1920년 경성부 인구는 25만 명을 조금 넘었는데, 조선인은 18만 명이었다. 이후 1945년까지 경성부 인구는 99만 명으로 늘었다. 그사이 인접 군역(郡域)을 포섭해 부역(府域)이 대폭 확장됐다.

경성, 평양, 부산, 청진, 대구, 인천의 6대 부 인구는 1930년 88만 명에서 1940년 202만 명으로 증가했다. 도시의 아스팔트, 수은등, 쇼윈도, 마네킹, 백화점, 고층건물, 엘리베이터, 카페, 그 사이를 누비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은 뭇 젊은이의 선망으로 근대문명의 상징이었다.

인구가 가장 크게 증가한 도(道)는 경기였다. 경성과 인천에서는 방직과 기계·기구 공업이 발달했다. 다음은 함북이었다. 거기서는 중화학공장 건설과 항만·철도·도로 토목공사가 활발했다. 인구를 가장 많이 방출한 도는 경북, 경남, 전북으로 모두 농업지대였다.

교육

1910년대까지 조선인의 교육에 대한 열의는 낮은 수준이었다. 1918년까지 보통학교의 보급은 제한적이었으며, 적령기 아동의 취학률도 3%에 불과했다. 1919년의 3·1운동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일대 계기였다.

이후 교육에 대한 조선인의 태도가 달라져 취학률이 1925년까지 13%로 높아졌다. 그사이 보통학교 수도 늘고 교육기간도 일본인과 같아졌다. 취학률은 농가의 형편이 다소 개선되고 학비가 낮아진 1930년대에 다시 불붙었다. 취학률은 1932년 16%에서 1943년 47%까지 급하게 상승했다. 남아의 취학률은 60%를 넘었다.

1930년대에는 중등교육, 곧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 상업학교, 농업학교, 사범학교에 대한 수요가 팽창했다. 1935~1943년 인문계 학교는 85개에서 150개로, 실업계 학교는 65개에서 118개로, 사범학교는 4개에서 15개로 증가했다. 입학생 총수는 1935년 9500여 명에서 1942년 2만1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중등교육에 대한 수요는 모두 충족되지 않았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중학교로 유학하는 조선인 학생이 증가해 1939년 그 수가 1만2500명이나 됐다.

초·중등 교육의 확충은 기업가, 기술자, 숙련공, 상인, 회사원, 조합원, 은행원, 공무원, 군인, 의사, 법률가 등의 근대적 계층을 양성했다. 이렇게 축적된 인적자본은 해방 후 한국인이 그들의 국민국가를 꾸려갈 수 있는 역사적 유산으로 작용했다.

생활수준

각급 역사책은 일제가 토지와 식량을 수탈해 조선인의 생활수준이 극도로 악화됐다고 서술해왔다. 쌀이 일본으로 수출된 것을 수탈이라 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시장거래였으며, 그 결과 조선의 총소득은 증가했다.

쌀이 대량 수출돼 1인당 쌀 소비량이 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만주에서 수입된 조, 수수, 콩 등의 잡곡류를 고려하면 곡물 소비량은 그리 감소하지 않았다. 감자, 고구마와 같은 보조 식품의 소비는 증가했다. 그 위에 육류, 채소, 과일, 어패류, 장류(醬類), 통조림, 기타 가공식품의 소비 증대를 고려하면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이 과연 감소했는지는 의문이다.

생활수준과 관련해서는 식료만이 아니라 의복, 주거, 의료, 교통, 교육, 문화 등 다른 비목(費目)의 소비도 종합적으로 검토돼야 한다. 생활수준이 개선되면 식료품비 비중이 줄어든다(엥겔법칙). 1911~1939년의 1인당 소비지출 구성에 관한 연구는 그 법칙이 일제하 조선에서도 타당함을 보였다.

생활수준에 관한 또 하나의 지표는 신장이다. 행려(行旅) 사망자, 곧 여행 중에 사망한 무연고자의 신장을 조사한 연구가 있다. 1881~1890년 출생자 1,027명의 평균 신장은 158.4㎝인 데 비해, 1911~1920년 출생자 1,125명은 160.2㎝다. 최하층에 속할 이들의 신장 추세는 일정기에 들어 조선인의 영양과 위생이 개선됐음을 말해 주고 있다.

도시 비숙련 노동자의 실질임금 추이에 관한 연구도 같은 결론에 이르고 있다. 앞서 소개한 대로 인구가 급하게 증가했다. 사망률 감소가 그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 출생 시의 기대여명(期待餘命)이 1925~1930년 37.4세에서 1935~1940년 40.9세로 길어졌다. 이 같은 인구 현상도 생활수준과 무관하지 않다.

소득분배

민족 간 소득분배에 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상세히 알기 어렵다. 경제성장이 일본인의 주도로 이뤄진 만큼 조선인의 몫은 상대적으로 작아졌을 것이다. 농촌 인구의 다수는 소작농이었으며, 일본인 지주의 토지는 점점 많아졌다.

도시부에 관해서는 경성에서 영업세를 납부한 상공인을 모집단으로 해 영업세의 크기, 민족별 구분, 자본형태, 업종 등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연구가 있다. 자본형태는 개인인가 회사인가의 차이를 말한다.

영업세의 격차를 발생시킨 주요 요인은 자본형태와 업종의 차이였다. 자본형태가 회사이면서 제조업과 토건업에 종사할 경우 소득이 가장 높았다. 의외로 조선인이냐 일본인이냐의 민족 요인은 유의(有意)하지 않았다.

요컨대 민족 간 소득분배가 악화된 것은 일본으로부터 제조업에 종사하는 회사 형태의 대자본이 유입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일본인 영업자의 25%가 회사 형태이던 데 비해 조선인 영업자의 그것은 9%에 불과했다. 조선인은 자본과 기술의 부족으로 제조업 종사자의 비중이 낮았다.

민족 간 소득분배가 악화됐다고 해서 조선인의 소득수준이 낮아진 것은 아니다. 전국적 범위의 영업세 납부자 가운데 조선인의 비중은 1930년 64%에서 1938년 72%로 증가했다. 영업세 납부자의 상위 25%에서 조선인의 비중은 42%에서 52%로 늘어났다. 문제는 상위 10% 이상의 최고소득 구간이 온통 일본인이란 데에 있었다.

일제하 경제성장의 과실이 죄다 일본인의 차지였다는 주장은 듣기엔 그럴듯하지만 실제의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

대군의 척후

일제하에서 성장한 근대적 계층에 대한 역사가의 평가는 우호적이지 않다. 일제의 지원으로 성장했고 일제의 지배에 협력했다는 이유에서다. 조선인 자본으로서 가장 성공한 경성방직(京城紡織)은 ‘종속적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치부됐다. 카터 에커트는 경성방직을 총독부의 보조금을 받았다는 이유에서 ‘제국의 후예(offspring of empire)’라고 폄훼했다. 일제가 낳고 길렀다는 뜻이다. 과연 그랬던가.

창업자 김성수는 전북 고부의 대지주 가문 출신으로 1914년 와세다대를 졸업했다. 1917년 일본계 조선방직이 부산에 진출한 데 자극을 받아 1919년 직기 100대의 경성방직을 창립했다. 경성방직은 일본계 자본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아남았다. 경성방직의 회계장부를 분석한 주익종은 이 회사가 창립 몇 년도 안돼 손익분기점을 통과했으며 이후에도 위기에 봉착한 적은 한 번도 없음을 명확히 했다.

회사는 총독부의 보조금에 사활을 걸지 않았다. 조선방직 등 다른 경쟁업체도 보조금을 수령했다. 경성방직의 성공은 경영이념으로서의 강력한 민족주의, 경영진의 뛰어난 능력, 종업원의 수월한 학습능력 덕분이었다.

소설가 이광수는 경성방직을 ‘대군의 척후(斥候)’에 비유했다. 언젠가 민족의 독립과 함께 대군처럼 수많은 기업이 세워질 터인데, 경성방직이 그 척후병과 같다는 뜻이다. 이후 전개된 역사는 이 불운한 지식인의 예견대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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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소농사회의 변용

日 관료로 출세한 향리 출신들…총독부 권력, 농촌 말단까지 침투

 

농업의 구조변동

1911∼1937년 조선 농업의 실질 총생산은 2.1배 증가했다. 이후 1945년까지는 전시기(戰時期)인데, 원료와 중간재가 부족해 감소 추세였다.

조선 농업은 일본에 쌀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1910년대 초 미곡 총생산에서 대일(對日) 수출미가 차지하는 비중은 2∼3%에 불과했으나 1916∼1920년엔 15%로, 1930∼1935년엔 49%로 급격하게 늘었다. 이 같은 시장조건에 규정돼 농업 총생산에서 미작(米作)이 차지한 비중은 1911년 48%에서 1937년 56%로 커졌다. 반면 맥류와 잡곡류의 전작(田作)은 후퇴했다. 채소류, 과일류, 특용작물류의 비중은 큰 변동이 없었다.

미작이 중심을 이룬 남부 평야지대에서는 전작만이 아니라 양잠, 축산, 농산가공 등 비경종(非耕種) 부문도 크게 쇠퇴했다. 농촌경제는 수출산업인 미작을 매개로 상품 생산과 시장경제에 깊숙이 포섭됐다. 그 결과 5일마다 열리는 농촌 장시가 1911년 1,084기에서 1940년 1,520기로 늘었다. 장시의 연간 거래액과 조선의 연간 무역액은 밀접한 연동성을 보였다. 장시가 수출입 상품의 집산기구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소작농의 증대

일제하 농촌경제의 동향은 인구조건에도 깊숙이 규정됐다. 1918∼1945년 경지의 규모는 434만㏊에서 451만㏊로 고작 4% 증가했다. 그에 비해 인구는 33%나 늘었다. 농가 호수는 265만 호에서 304만 호로 늘었다. 그에 따라 호당 평균 경지는 1.7㏊에서 1.5㏊로 줄었다.

소유 형태별 농가 구성의 추이를 보면 1932년까지 자작농과 자소작농이 감소하고 소작농이 증가했다. 농가 호수에서 소작농의 비중은 1916년 37%에서 1932년 55%로 늘었다. 이후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 종래 이 같은 농가 구성의 추이를 두고 지주제와 시장의 압박을 받아 상하 전 계층의 농가가 몰락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해석에는 인구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 예컨대 자작농과 자소작농의 감소분보다 소작농의 증가분이 훨씬 더 많았다. 이는 1890년대부터 인구가 팽창하면서 1910∼1920년대에 이르러 아버지나 형의 집에서 차남이나 삼남 등이 소작농 형태로 분가했기 때문이다. 그런 인구가 1931년까지 증가한 소작농 호수의 40%를 차지했다.

나머지 60%는 경제 요인에 의한 몰락이었다. 1924년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 경제는 불황의 연속이었다. 1930∼1932년에는 세계 대공황의 파도가 밀어닥쳤다. 거기에다 체계성을 잃은 총독부의 농업정책도 한몫했다.

총독부 관리들은 조선 농업의 실정에 무지했고 오만했다. 그들은 수리와 비료를 많이 공급해 증산을 촉구했지만(산미증식계획), 종자의 성질이 그에 맞지 않아 도열병의 피해만 안겼다. 미작의 생산성은 1920년대 내내 정체했으며, 그 사이 농가는 지주제와 시장의 압박으로 심각하게 몰락했다. 

지주제의 발전

일정기에 걸쳐 지주제가 번성한 근본 요인은 역시 과잉 인구였다. 소작료율은 생산량의 평균 50% 이상이었다. 그럼에도 소작지는 언제나 초과 수요의 대상이었다. 농촌공업의 부재로 다른 소득의 기회는 없었다. 초과 수요로 인해 토지 임대차 시장에서 지주는 늘 우세한 협상력으로 소작농을 압박했다.
 

지주제의 중심은 일본인 농장주였다. 러일전쟁 이후 많은 일본인이 농업경영의 새로운 기회를 찾아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 수는 1915년까지 7,000여 명에 달했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주로 금강,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낙동강의 하류 연해 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에는 하수와 조수의 퇴적 작용으로 광대한 저습 미간지가 형성돼 있었다.

일본인들은 그 토지를 손에 물을 묻히고 좁쌀을 줍듯이 헐값으로 대량 매수한 다음 제방을 쌓거나 관수·배수시설을 만들어 비옥한 농장으로 개척했다.

일본인 농장주는 생산요소와 노동과정을 합리적으로 통제한 자본가적 경영자였다. 반면 조선인 지주의 경영방식은 정태적이었다. 그로 인해 일본인 지주의 성장세는 조선인 지주를 능가했다. 1930년대 들어 조선인 지주는 정체하거나 후퇴했는데, 일본인 지주는 계속 성장해 지주제의 중심을 차지했다.

농촌 신흥세력

이전에 소개한 대로 1890년대 이래 미곡의 대일 수출시장을 무대로 해서 새로운 형태의 지주가 성장했다. 농촌사회의 실력자로 등장한 신흥 지주의 다수는 종래 군현의 행정을 세습한 향리(鄕吏) 가문 출신이었다. 그들은 면사무소, 금융조합, 수리조합, 농회, 면협의회와 같은 총독부의 농촌 지배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들의 일부는 총독부의 중견 관료로 출세했다. 1925년 조선인 군수 300명 가운데 260명이 향리 가문 출신이었다.
 

이들 신흥세력의 역사적 역할은 제국주의의 충실한 협력자 이상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영구히 동화시키기 위해 근대문명의 제도와 기구를 이식할 때, 그것을 수용하고 정착시키는 데 앞장선 것은 이들 신흥세력이었다. 이들은 지주경영을 통해 축적한 자본을 상업, 공업, 금융에 투자해 민족경제의 발전을 이끌었다. 

일본으로 유학해 신학문을 익힌 그들의 자제는 실업에서뿐 아니라 언론, 교육, 문학, 학술, 예술 등의 여러 방면에서 계몽적 지도자로 활약했다. 그들은 이후 일제가 패망하고 대한민국이란 국민국가가 세워질 때 이를 지지한 주요 정치세력을 이뤘다.

반면 전통 양반세력은 일정기에 걸쳐 조용히 침잠했다. 그들은 근대문명에 적대적이었으며, 격변하는 세계를 이해하고 대응할 능력이 없었다. 

사회정책

1920년대까지 총독부의 농업·농촌정책은 지주세력을 앞세워 미곡의 증산을 추구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1930년대 들어 총독부는 개별 농가의 생산과정을 직접 장악해 안정시키려는 사회정책으로 전환했다. 그 배경에는 1920년대 후반 이래, 특히 1930∼1932년의 공황기에 심각하게 진행된 농가의 몰락이 있었다. 정책의 전환은 1927년부터였다.
 

총독부는 소작농의 소작권을 안정시키고 강화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을 내렸다. 1932년에는 ‘조선소작조정령’이란 법을 제정해 모든 종류의 소작쟁의를 지방재판소, 군수, 경찰서장이 참여하는 소작위원회가 강제 조정토록 했다. 1934년에는 ‘조선농지령’을 공포해 소작권을 지주에게 대항할 수 있는 권리로 성립시켰다. 이 같은 정책환경의 변화로 지주제는 1933년 이후 성장세를 멈췄다. 

나아가 총독부는 자작농 창설 사업을 벌여 지주들의 소작지를 소작농에게 판매하도록 강제했다. 소작농에게는 금융조합이 토지매입 자금을 지원했다. 그 결과 1940년까지 총 농가의 36%인 109만 호에 호당 0.3㏊의 자작지가 설정됐다.

이외에 총독부는 ‘농촌진흥운동’의 기치를 걸고 농가를 안정시키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벌였다. 1933년 이후 10년간 조선의 소농경제는 상대적 안정기를 누렸다. 총독부의 권력이 농촌사회의 말단에까지 깊숙이 침투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복선의 전환
 

농촌 주민의 일상생활에서 새로운 변화가 감지되는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였다. 면과 면을 연결하는 신작로가 닦이고, 그 위를 버스와 트럭이 오가고, 면의 시가지가 정비되고, 하수구가 시설되고, 전기가 들어오고, 정미소와 양조장이 개업하고, 상설점포가 자리를 잡고, 공설 장소에서 활동사진이 돌려지고, 신문사 지국이나 카페와 같은 문화시설이 들어선 것은 대개 그 무렵부터였다.

그렇지만 면 소재지를 넘어 사방의 동리로 들어가면 딴판이었다. 거기서는 근대의 모습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거기서는 구래의 공간과 질서가 온존했다. 농촌 주민은 여전히 양반과 상민의 신분 감각으로 서로를 차별하고 대립했다. 친족 결성, 족보 편찬과 같은 양반문화의 실천을 통해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개선하려는 전통 소농사회의 행동 원리는 일정기에 걸쳐 오히려 강화됐다.

호주가 장수할 경우 가족 구성원은 40여 명으로까지 부풀었다. 경남 언양면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친족집단은 1912년 17개에서 1942년 34개로 증가했다. 이에 속한 인구는 전 주민의 21%에서 36%로 늘었다. 1930년 전국의 6만여 개 마을 가운데 동성부락 비중은 48%에 달했다. 근대로의 전환은 근대가 전통을 해체하는 식의 단선(單線)이 아니라 전통을 강화하기도 하는 복선(複線)으로 전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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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전시경제의 조선

日帝전쟁 후방기지 된 조선…총독부, 곡식 강제매수·73만명 노무 동원

 

엔 블록

1929년 10월 미국의 주식시장이 붕괴했다. 대공황은 세계로 번져갔다. 세계를 통합한 통화와 금융 체제가 무너졌다. 세계 경제는 영국, 미국, 독일, 일본을 축으로 하는 통화 블록으로 분열했다.

일본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걸친 엔(円) 블록을 구축했다. 일본제국의 판도가 확장하는 과정이었다. 1931년 일본은 만주를 침략해 만주국이란 괴뢰국가를 세웠다. 1932년에는 중국 상하이를 점령했다. 1937년에는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을 점령했다. 이로써 1945년까지 이어진 중일전쟁이 개시됐다. 1939년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뒤이어 일본은 남방 진출을 감행했다. 석유에 대한 욕망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엔 블록은 몇 개의 동심환(同心環)으로 이뤄졌다. 일본이 중심으로서 제1환이라면, 조선·대만·사할린은 제2환을, 중국 관내의 점령지는 제3환을, 남방 점령지는 제4환을 이뤘다. 1939년 수립된 블록 차원의 계획에서 조선을 포함한 제2환은 중심 일본에 철광석, 알루미늄, 아연, 중유, 인견, 펄프, 금 등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조선 경제는 큰 변화를 경험했다.

제국의 파탄

일본의 남방 진출은 미국과의 군사적 충돌을 초래해 제국 전체의 붕괴로 이어졌다. 미국은 일본의 동남아 점령에 맞서 일본과의 통상조약을 파기하고 석유를 포함한 산업 물자의 대일 수출을 금지했다. 나아가 일본의 해상보급로를 차단했다. 궁지에 몰린 일본은 미국과 필사의 협상을 벌였으나 미 군부의 강경 노선에 부딪혀 실패했다.

1941년 12월 일본은 하와이의 미 해군기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에 돌입했다. 해상수송이 마비되자 엔 블록에서 조선의 역할이 점점 커졌다. 1943년 조선은 블록 전체에서 선철의 8%, 철광석의 16%, 석탄의 6%, 알루미늄의 8%를 공급했다.

1944년이면 해상의 안전 항해가 조선과 일본의 바다로 축소됐다. 이후 조선은 쌀·면포·소금 등 소비재까지 일본에 공급했는데, 그로 인해 조선의 생활수준이 크게 악화했다. 제국의 파탄 과정은 조선이 해방되는 행운의 과정이었다.

군사공업의 건설

엔 블록의 정책에 따라 군사공업이 조선에 건설됐다. 최초의 군사공업은 1937년 부산 영도에 설립된 조선중공업이었다. 이 회사는 1000t급 이상의 강선(鋼船)을 건조할 수 있는 최초의 조선소였다. 대부분의 군사공업은 광물자원이 풍부한 조선 북부에 건설됐다. 일제가 패망할 당시 조선 북부에 있던 일본 광산회사와 제조업 공장은 자본금 50만원 이상의 대형 업체만 해도 170개에 달했다. 1911∼1936년 설립된 것이 58개, 1937∼1945년 설립된 것이 95개였다(나머지는 불명).

1937년 이후 조선 북부로 진출한 일본의 공장은 선철·강괴·알루미늄·마그네슘 등의 금속공업이 주류였다. 1941년 이후 일본의 공업이 조선 북부로 이동한 데에는 미 공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한 소개(疏開)의 목적도 있었다. 병기를 제작하는 공장도 여러 개였다.

1942년에 설립된 조선비행기제작소는 50대의 비행기를 제작할 설비 능력을 갖췄는데, 종전까지 18대를 제작했다. 평양의 조선병기제조소는 소총·박격포 등 개인화기와 월 19만 발의 탄환을 생산했다. 종업원 규모는 6000명을 넘었다.

1937년 이후 조선 북부는 세계 유수의 중화학공업지대로 변모했다. 종전 당시의 1인당 철도 길이와 발전량은 일본을 능가했다. 일제는 이후 그 지역을 통치한 공산주의자들에게 더없이 풍족한 유산을 남겼다.

식량의 공출

전시기의 농업은 비료와 자재 부족으로 후퇴했다. 미곡 생산은 1941년 2,500만 석에서 1944년 1,600만 석으로 감소했다. 그럼에도 총독부는 군량 확보를 위해 미곡의 집하, 유통, 소비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1939년 총독부는 미곡의 자유시장을 폐지했으며, 1940년부터는 미곡의 배급제를 실시했다. 이를 위해 미곡을 법정가격으로 강제 매수하는 공출제를 시행했다. 농가는 자가 식량을 제외한 모든 미곡을 공출해야 했다. 1943년부터는 맥류도 공출의 대상이 됐다. 미곡 총생산에서 공출의 비중은 1941년 43%에서 1944년 64%로 증가했다. 그에 따라 농가의 식량 사정이 크게 악화했다.

총독부의 전시통제는 지주제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총독부는 식량 증산과 농민 동원을 위해 지주제를 억압했다. 지주의 소작료 수취에 앞서 소작농으로부터 먼저 공출했다. 지주의 소작료 인상도 불허했다. 소작농에겐 생산장려금을 지급했는데, 지주에겐 지급하지 않았다.

이 같은 환경 변화에 따라 지주들이 토지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여러 지역에서 1942년 이후 0.5㏊ 미만 하층 농가의 소유지가 부쩍 증가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전쟁은 사회개혁을 몰고 오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평민이 전장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구이동

조선인의 역외 유출, 곧 만주나 일본으로의 이동은 1910년대부터 시작됐다. 일본으로의 순유출은 1945년까지 도합 184만 명이었다. 1910년대는 연평균 5,000명, 1920년대는 연평균 3만,5000명, 1930년대는 연평균 7만2,000명이었다. 일본의 임금 수준은 조선보다 3배가량 높았다. 그것이 인구이동을 유발한 기본 요인이었다.

초기의 이동은 주로 단신 이주로 단기취업이 목적이었다. 1933년 이후에는 가족과 함께 일본에 정착하는 조선인이 일본 거주 조선인의 다수를 차지했다. 그들은 주로 도쿄, 오사카, 후쿠오카 등 광공업 도시의 하층민으로 정착했다.

일본의 조선인 사회는 조금씩 사회경제적 지위를 개선해 갔다. 1925년 일본에서 보통선거제가 시행되자 조선인도 참정권을 인정받았다. 1933년부터는 조선인이 밀집한 지역에서 지방의회 선거에 입후보하는 조선인들이 나타났다. 1945년까지 후쿠오카현에서 지방의원으로 입후보한 조선인의 연인원은 33명이며 그 가운데 17명이 당선됐다.

일본으로의 이동은 1939년부터 연간 10만 명 이상으로 갑자기 증가했다. 1941년이 그 정점인데 20만8000명에 달했다. 전쟁의 영향으로 일본에서 저임금 노동력이 크게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먼저 정착한 이민자가 친족을 초청하는 연쇄 이민이 이주의 주요 경로였다.

이 같은 자발적 이주가 1939년부터 시작된 노무 동원보다 많았다. 1939∼1942년의 자발적 이주는 67만 명이었다. 이에 비해 각급 동원은 30만 명이 조금 못됐다. 자발적 이주는 1942년 이후 크게 줄었다. 미 공군의 일본 공습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1945년까지 연간 10만 명 이상이 일본으로 자발적으로 이주했다.

노무 동원

일본으로 노무 동원이 시작된 것은 1939년부터다. 그해 총독부는 일본 기업의 요구에 부응해 그들이 조선에서 노무자를 모집하는 데 행정 편의를 제공했다. 이후 1941년까지 17만 명 정도가 일본으로 모집됐다. 1942년부터 총독부는 일정 지역에서 일정 수의 노무자를 동원해 일본 기업과 고용 관계를 맺어주는 관(官)알선을 개시했다.

기존의 모집은 동원 효과가 그리 크지 않았다. 모집에 응한 조선인 상당수가 일본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다 고임금의 다른 작업장으로 도망했다. 이에 관이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생겨 알선 정책으로 전환했다. 1944년 7월까지 알선에 의한 동원은 25만 명이었다.

1944년 9월부터는 국민징용령에 의한 징용이 동원의 주요 수단이 됐다. 징용은 이전의 모집이나 관알선과 달리 조선인의 의사에 반해 강압적으로 이뤄졌다. 오늘날 한국인의 동원에 대한 쓰라린 기억은 대개 1944년 9월 이후의 징용에서 형성된 것이다.

징용 규모가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1944년 9월부터니까 그해의 총 30만 명 가운데 절반을 징용으로 볼 수 있다. 1945년부터는 미 잠수함 활동으로 일본으로의 도항에 큰 제약이 걸렸다. 1945년의 동원이 1만 명에 불과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상 1939∼1945년 모집, 관알선, 징용에 의한 조선인의 역외동원은 73만4000여 명에 달했다. 그들이 일본의 공장과 광산에서 노예로 혹사당했다는 오늘날 한국인의 집단기억은 언제부턴가 환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노예 사역의 수익성이 노무 계약의 그것보다 클 수 없음은 너무나도 자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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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여러 갈래의 정신

일제의 억압과 차별에 민족의식 싹 터…'단군의 자손' 인식 확산

 

충역의 혼잡

1945년 8월 15일, 일제는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중국에서 그 소식을 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실패감을 맛보았다. 천신만고로 준비해온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허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곧이어 임시정부 내 조선민족혁명당 계열이 들고일어났다. “당신들이 언제 국내 인민으로부터 정권을 받았소.” 그들은 김구의 한국독립당 계열에 임시정부의 해체를 요구했다.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이승만의 심경도 김구와 비슷했다. 동년 10월 이승만은 미주의 동포에게 환국 인사를 전하면서 “너무나 통분해 차라리 죽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싶다”고 했다. 동포끼리 싸우는 통에 임시정부가 사사단체(私私團體)로 전락해 국제사회의 승인을 못 받은 가운데 외국군대가 남북을 갈랐고, 그에 편승하는 정치세력이 가득해 충역(忠逆)이 혼잡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는 이유에서였다.

홉스적 자연상태

중국 국민당정부는 임시정부를 지원하면서 몇 차례나 단합을 호소했다. 1939년 국민당정부의 왕룽성은 한국인 독립운동가 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취지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들은 개성이 워낙 강한 데다 자존심이 세며 자기중심적 경향이 짙다. 서로 기득권을 지키는 데 급급해 진정한 통일을 이루기는 지극히 어려워 보인다. 당파 간에 극심한 시기, 질투, 견제 현상이 난무하고 있다.”

미주의 독립운동가 사회를 관찰한 미국인의 시선도 냉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후 신탁통치안의 원형이 된 미 국무부의 랭던보고서(1942)는 “한국인은 정치 경험의 부족으로 그들 나라를 어떻게 운영할지 모르고 그들 나라를 방위할 능력도 없으므로 적어도 한 세대 동안 강대국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나는 80년 전의 한국인 사회에 대한 여러 외국인의 이 같은 평가를 부정할 요량이 없다. 이전 연재의 관련 대목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조선왕조의 국가체제는 천자-제후-대부-사-서의 위계로 짜인 국제질서였다. 지배와 동의의 원리가 배제된 가운데 개별인신에 신역(身役)을 차별 부과하는 체제였다. 그로 인해 잘 뭉친 사회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왕조가 해체되니 각 위계에 놓인 개인이 바닥으로 와락 쏟아졌다. ‘쟁반 위의 모래알’과 같은 사회 양태가 그렇게 조성됐다. 국가 이전 ‘홉스적 자연상태’로의 회귀였다. 일제하 35년에 걸쳐 사회의 그런 성질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조종 500년의 추억

그 ‘홉스적 자연상태’가 해방 이후 독자의 ‘국가상태’로 재건되는 과정은 참으로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이다. 그를 위해선 우선 일제하에서 한국인의 정신이 보인 몇 갈래의 흐름을 파악하고 진단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조선왕조의 지배층 양반 신분의 정신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조선 세세(歲歲)의 원수 왜적이 지배하는 난세였다. 그들은 난세의 위험을 피해 은둔하면서 조종(祖宗) 500년과 소중화(小中華)의 맥을 회복할 성인의 출현을 고대했다. 그들은 근대문명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에 적대적이었다. 총독부가 토지를 수용해 신작로를 닦고 철로를 놓을 때 그들은 분개했다. “저것들이 우리의 생활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들에게 해방 이후는 더욱 심한 난세였다. 오랑캐 일본은 그래도 인간이지만 새로 들어온 미국과 소련은 아예 금수였다. 그들은 500년 화맥(華脈)을 잇는 선현을 제사하기 위해 철 따라 향교, 서원, 영당(影堂)에 모이길 멈추지 않았다. 그 집단의 물리적 위세는 점점 시들었지만, 전통 사회에 발한 그들의 정신적 지도력은 건재했다.

민족의 탄생

둘째는 전통문화의 변이로서 민족의 탄생이다. 우리 한국인은 단군의 자손으로서 언어와 문화와 생사고락을 같이한 운명공동체라는 정치의식은 이전 시대엔 없었다. 조선 문명의 시조는 기성(箕聖), 곧 기자 성인이었다. ‘민족’이란 말은 1900년대에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다. 그 이전엔 ‘민족’이나 그에 상당하는 말이 없었다.

일제의 억압과 차별을 받으면서 한국인은 민족이란 공동체를 발견했다. 최남선이 쓴 3·1독립선언서는 그 민족에 ‘자유인의 공동체’라는 선진적 뜻을 담았다. 그렇지만 보통의 사람에게 더 강렬하게 전해진 민족의 함의는 ‘우리 모두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혈연공동체 의식이었다.

그 같은 의식의 전환을 훌륭하게 묘사한 사람으로 신채호를 들 수 있다. 그의 자전적 소설 《꿈하늘》에 의하면 신채호는 1907년 기존의 모든 전통과 결별하면서 민족주의자로 환생했다. 단군에 뿌리박은 박달 겨레의 일원으로, 삼한의 씩씩한 장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민족은 역대 영웅과 위인의 정신적 총합이다. 나는 민족이요, 민족은 나다.

이 강렬한 정신적 전체주의는 오로지 왜적과의 승리만을 위한 무력 전쟁을 추구한다. 그것을 거부하는 온갖 잡것으로서 “공자, 석가, 예수, 워싱턴, 관료, 지식인, 실업가, 외교론자”는 죄다 “똥물에 튀겨 지옥 불에 던질 것”이었다. 이렇게 생겨난 민족주의는 지난 100년간 한국인의 정치의식을 점점 강렬하게 지배해왔다.

공산주의의 길

셋째는 공산주의로 향한 길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발생했다. 다음해 1918년에는 벌써 연해주 한국인 사회에서 공산당이 조직됐다.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일정 지분으로 참여했다. 이후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여러 사회단체와 정치조직이 국내에서 결성됐다.

1925년 조직된 조선공산당은 5년의 짧은 역사에서 볼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총독부의 탄압이 강력했을 뿐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이 여러 당파로 대립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945년 해방을 맞아 조선공산당이 재건될 때 그에 참여한 한국인의 수나 충성도는 다른 어느 정당을 능가했다.

인간, 사회, 역사에 대한 공산주의의 이해는 동아시아 유교의 그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공산주의 혁명의 열기가 동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신속히 전파된 것은 서양 제국주의가 진출한 이래 이 지역의 전통 국가체제와 정치철학이 거의 해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공산주의가 다수 한국인을 포섭한 것은 현실의 모순이 너무나 심각했기 때문이다.

대다수 한국인은 일제의 민족적 차별에 더해 소작농으로 또는 임노동자로 지주와 자본가의 지배를 받는 처지였다. 양반과 상민의 차별 감각도 여전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민족적, 계급적, 신분적 차별은 설명돼야 했고 해결돼야 했다.

공산주의가 큰 흡인력을 발휘한 것은 그것만이 이 모든 고난의 구원자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서양의 정치철학과 사회과학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지성의 공백이 공산주의의 정신적 독재를 허용했다.

태평천하

넷째는 절대다수의 보통사람에게 열린 황국신민(皇國臣民)의 길이다. 그들은 원래 조선왕조의 신민이었다. 일제의 지배로 그들의 일상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 신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느 농민은 “청 황제를 대신해 일 황제가 반포한 달력을 받으니 세상이 변한 줄 알겠다”고 했다. 시간의 지배자가 바뀌었다. 큰 변화였다. 그래도 보통사람에겐 그리 중요한 변화가 아니었다. 그들의 일상은 오히려 개선됐다. 양반의 토호질이 멈추고, 비적이 사라지고, 조세가 공정하고, 장시가 늘어나고, 막힌 저수지가 준설됐다.

그런 세상을 소설가 채만식은 ‘태평천하’라고 묘사했다. 문학적 발상만은 아니었다. 시대적 감각이기도 했다. 1927년 경북 예천군 어느 마을에서는 30년 만에 단오 축제가 열렸다. 한 양반은 그날의 일기에다 “성황제가 끝난 후 동리민이 동사(洞舍)에 모여 배불리 먹고 취하고 웃고 즐기니 이 또한 태평기상이 아닌가”라고 적었다.

뒤이어 전쟁의 시대가 열리자 젊은 세대가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변했다. 그들은 개인의 자립과 책임을 강조한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였다. 국가가 부르면 몸을 던질 각오가 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인간이었다.

마지막 다섯째는 자유의 길이다. 대한민국으로 이어진 길이다. 그에 대해선 다음 회에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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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자유의 길

사상 대립으로 사분오열된 해방공간…자유주의 설파한 이승만

대분기

영국 경제학자 앵거스 매디슨(1926~2010)은 세계 각 지역 각 시대의 1인당 소득수준을 추계했다. 그에 의하면 15세기까지 세계는 평등했다. 정확히 말해 동아시아의 중국이 서유럽보다 조금 더 잘 살았다. 16세기 이후 서유럽이 중국을 추월했다. 서유럽과 그로부터 뻗어난 지역이 세계를 선도하기 시작했다. 이들 지역과 여타 세계와의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평등한 세계가 불평등한 세계로 갈라졌다. 이 대분기(大分岐)를 초래한 원인은 무엇인가.

종교개혁 이후 서유럽에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이 탄생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그렇게 생겨난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공간이 대분기의 원동력이었다.

대분기의 철학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은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했다. 그 인간의 신체와 정신은 누구에 의해서도 소유되지 않는다. 그 인간이 자연에 노동을 가해 취득한 재산은 국가도 침범할 수 없는 권리다. 하느님은 자연을 기기묘묘하게 창조해 인류의 공유물로 주셨다. 이는 인간이 서로 개방하고 통상하라는 섭리다. 개방과 통상은 분업과 과학을 초래해 문명을 발전시킨다. 개방과 통상은 세계 평화와 공영의 길이다. 문호를 닫고 백성을 노예로 부리는 나라는 쇠퇴하거나 소멸할 것이다.

《독립정신》

1904년 일본과 러시아가 충돌했다. 한성감옥에 있던 이승만은 그 소식을 듣고 《독립정신》이란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 전쟁이 끝나면 조선은 두 나라 중 어디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그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조선은 숨이 거의 넘어가는 중환자다. 다시 일어설지 의심스러운 종족이다. 큰 고기는 작은 고기를, 작은 고기는 송사리를 먹는 아수라 사회다. 소수의 양반이 노예근성의 백성을 갈취하는 왕조다. 도덕이 타락해 온 하늘 아래 사기와 거짓말이 난무한다. 어찌해서 이 지경이 됐는가. 자유와 독립의 정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동포에 전하고자 미친 듯이 붓을 날려 4개월 만에 완성한 것이 《독립정신》이다. 

자유와 독립은 근로, 저축, 개방, 통상, 분업, 경쟁, 과학, 기술진보, 나아가 사해동포(四海同胞)다. 그리하여 자유는 문화다. 책의 곳곳에서 이승만은 마르틴 루터, 토머스 홉스, 존 로크, 애덤 스미스, 임마누엘 칸트, 토머스 제퍼슨의 주의·주장을 재생하고 있다. 감옥생활이 강요한 독서와 사색과 기도의 축복이었다. 《독립정신》은 불과 29세의 저자가 이미 완숙한 경지의 자유주의 사상가임을 입증하고 있다. 조선왕조가 그 말년에 거둔 가장 풍성한 지적 성취였다.

역사의 주류

1904년 8월 이승만은 5년 7개월 만에 출옥했다. 연후에 미국 하원의장에게 독립을 청원하는 밀사로 파견됐다. 미국 대통령을 접견하는 행운도 누렸다. 임무를 수행한 이승만은 1910년 8월까지 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를 취득했다. 영어가 탁월한 데다 서유럽과 미국의 철학에 정통한 지력이기에 가능한 위업이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미국이 중립 의무에 충실한 한, 전쟁을 수행하는 어느 국가도 미국의 상선을 검문, 검색할 수 없다는 미국의 주장이 국제법으로 성립해 가는 19세기 역사를 추적한 것이다. 논문은 탁월했으며, 프린스턴대는 이를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대학 총장 우드로 윌슨은 이승만을 장차 그의 민족을 구원할 선지자로 지목했다.

윌슨은 이후 미국 대통령이 돼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했다. 통상은 전시하에서도 부정될 수 없는 자연권이다. 미국의 건국자들이 추구한 그 정신은 윌슨 대통령에 이르러 민족자결주의의 선포와 국제연맹의 설립으로 표출됐다. 장차 세계를 평화와 번영으로 이끌 역사의 주류였다. 장차 한국 민족이 자유인으로 동참할 세계사의 주류였다. 이승만은 그 주류에 접신했으며, 동포를 그 길로 인도했다.

영광과 오욕

이승만의 화려한 이력은 진작에 그를 ‘신화에 가린 인물’로 만들었다.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발족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얼마 있지 않아 임시정부는 심각한 분쟁에 휘말렸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이승만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장차 성립할 국제연맹이 한국의 완전 독립을 보장하는 조건에서 한국을 일본에서 분리해 위임통치해 줄 것을 청원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미국과 같은 ‘중립적 상업지역’으로 변해 모든 나라가 혜택을 본다는 취지였다. 그 일은 세계의 자유인이 후진 민족을 위해 아직 시도한 적 없는 참신한 과제였다.

크게 보아 역사는 이승만의 청원대로 흘렀다.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서 분리해 3년간 통치했으며, 국제연합의 결의와 승인으로 대한민국이 독립했다. 그 길이 세계사의 주류였다. 그러하기에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임시정부의 요인들은 격분했다. 신채호 등 54명은 이승만의 청원을 “조선을 미국의 식민지로 삼아달라”는 매국·매족 행위라고 성토했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지만, 이승만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았도다.” 

그들은 이승만이 작성한 청원서를 읽지 않았으며, 읽더라도 그 뜻을 이해할 만한 지성의 소유자들이 아니었다. 적대감은 소문과 선동으로 퍼져나갔다. 이승만은 사과를 거부했다. 임시정부는 분열했으며, 1925년 남은 세력은 임시대통령을 탄핵했다.

독립의 정세와 방략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은 미국과 일본이 충돌하는 ‘그날’에 이뤄진다고 믿었다. 한국의 멸망은 미국, 영국, 일본 등 열강의 공조하에 이뤄진 일이다. 그런 국제적 공조가 깨지지 않은 한 조선이 독립할 가능성은 없다. 그 공조체제는 언젠가 깨질 것이다. 일본은 미국과 같은 자유인의 공화국이 아니다. 자유통상의 나라가 아니다. 자신을 신의 나라로 여기는 가운데 아시아를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나라다. 그래서 미국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날’이 언제인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반드시 온다.

독립 정세에 관한 이승만의 판단은 이와 같았다.

그럼 ‘그날’이 오기까지 무엇을 할 것인가. 우선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일이다. 망국인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세계로부터 잊히는 것이다. 줄기차게 일본의 한국 병합과 그에 협조한 미국 외교가 저지른 불의와 불공정을 고발해야 한다. 우리의 빼앗긴 자유를 돌려달라고 외쳐야 한다. 다음은 합심 단결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 교육하고 실업해 동포사회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드디어 ‘그날’이 오면 “우리의 대포와 우리의 비행기로 왜적에 선전포고하는 것은 만국공법이 허락하는 우리의 권리다.” 

때가 되지 않았는데, 한두 사람이 권총과 폭탄으로 적의 수괴 몇 사람을 해친다고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날’을 위해 우리는 뭉쳐야 한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중심으로 군대식 규율로 단결해야 한다. 독립 방략에 관한 이승만의 주장은 이와 같았다.

‘그날’이 오다

이승만과 대립한 독립운동세력은 이승만의 방략을 ‘외세 의존의 허무주의’라고 비난했다. ‘그날’을 환상이라고 일축했다. 그렇지만 ‘그날’은 오고야 말았다. 1941년 8월 이승만은 미국과 일본의 충돌이 임박함을 경고하는 《일본내막기》를 출간했다.

4개월 뒤 일본은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했다. 이승만의 경고를 예사롭게 넘긴 미국인은 경악했다. 그 사람이 오래전부터 해온 이야기가 진실임을 깨달았다. 미국이 지핀 불씨가 결국 미국을 태워버릴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었다.

미국은 한국 독립을 태평양전쟁의 한 가지 목적으로 삼았다. 1943년 카이로선언이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념해”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것은 그렇게 빚어진 미국인의 대(對)한국 책무감의 발로였다. 이승만이 소리쳐온 ‘자유의 길’이었다.

20세기 전반 한국인의 정신은 전통 소중화주의, 그로부터 변이한 민족주의, 소련에서 유입한 공산주의, 일제가 강요한 동화주의, 미국에서 들어온 자유주의의 갈래로 분열했다. 그 대립이 너무 심해 아직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자유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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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노예의 길

스탈린식 전체주의 들어선 北…산업 국유화하고 토지 강제 몰수

 

소련의 북한 방침

전승국 소련은 그와 국경을 맞대는 점령지에 공산체제 국가를 세우는 것을 양보할 수 없는 전리품으로 간주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곧바로 남한과의 인적 왕래와 물적 교류를 차단, 통제한 것은 그 같은 의도에서였다.

1945년 9월 소련의 스탈린은 극동 소련군사령부에 “북한에 반일적 민주주의 정당·조직의 광범위한 블록을 기초로 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하라”고 지시했다. 이 말은 공산주의자들이 후진 지역에서 혁명을 추구할 때 쓰는 상투적 표현이다. 공산당 주도하에 자본가와 지주 세력을 배제한 통일전선을 결성하고 이를 통해 공산혁명의 제1단계로 민족·민주혁명을 수행한다는 뜻이다.

이 같은 전략에 따라 그해 10월 북조선공산당이 조직돼 서울의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독립했다. 당의 책임자에는 소련군 대위 김일성이 지명됐다.

동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전승 4개국의 외상이 모여 한국 방침을 결정했다(모스크바협정). 그들은 한국에 ‘민주적 임시정부’를 세우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미국군과 소련군이 공동위원회를 구성하며, 4개국이 임시정부를 5년간 신탁통치하자는 데 합의했다. 별다른 준비 없이 회담에 임한 미국 외상은 전날 밤에 마신 술로 숙취 상태였다.

이 협정을 통해 소련은 그의 북한 방침에 대한 연합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나아가 남한으로까지 그 방침을 확장할 수 있는 권리와 기회를 확보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소련군은 지방행정을 담당할 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남한에서 군정을 펼친 미국군과 달리 소련군은 해방군으로 남아 주민의 환심을 사는 가운데 인민위원회를 통제하는 점령 정책을 펼쳤다. 1946년 2월 인민위원회의 전국연합으로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됐다. 북한을 통치하는 사실상의 임시정부였다. 모스크바협정에 따라 장차 통일적 임시정부가 구성될 예정이지만 북한의 공산세력은 그에 구애받지 않았다. 이즈음 북한에서 비공산세력은 거의 제거되거나 추방된 상태였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20개 정강의 개혁을 김일성 명의로 발표했다. △일제 통치의 온갖 잔재를 숙청할 것 △일제의 법률과 재판기관을 철폐할 것 △반민주주의 분자와 무자비하게 투쟁할 것 △전체 인민의 자유와 재산을 보장할 것 △주요 산업과 대기업을 국유화할 것 △개인 수공업과 상업은 허락할 것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에게 무상 배분할 것 등이었다.

이로써 일정기에 걸쳐 한국에 이식된 근대문명의 원리와 제도가 전면 부정됐다. 인민의 자유와 재산은 보장된다고 했지만, 그것을 보장하는 민법을 위시한 법률과 재판기구는 폐기됐다. 사권(私權)의 주체로서 ‘개인’이란 범주는 이후 북한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북한 주민은 ‘노예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토지개혁과 성출제

뒤이어 무상몰수와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이 행해졌다. 이에 따라 지주, 자작농, 민족반역자, 사원, 종교단체 등 약 42만3,000호로부터 100만 정보의 토지가 몰수돼 토지가 없거나 적은 72만5000호에 분배됐다.

지주 등은 다른 군으로 이사해야 농지를 분배받을 수 있었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다른 군이 아니라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남하한 인구가 1948년까지 대략 100만 명에 달했다. 북한 전 인구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어떠한 민족적 합의도 없이 강행된 북한의 토지개혁은 남한과 북한을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갈라놓고 말았다. 분단을 향해 먼저 달린 쪽은 북한의 공산세력이었다. 그들의 오도된 인간관, 분열적 사회관, 적대적 세계관이 분단을 초래한 궁극적인 원인이었다.

고농(雇農)과 빈농에 분배된 토지에 대해 북한 당국은 매매와 임대를 금지했다. 북한의 토지는 사실상 국유화됐다. 뒤이어 북한 당국은 각종 수확량의 25%를 현물세로 수취했다. 나머지 75%에 대한 농민의 권리도 온전하지 않았다.

북한 당국은 총독부가 전시기에 시행한 공출제를 폐기하지 않았다. 공출제는 성출제(誠出制)로 이름을 바꿔 존속했다. 전국의 마을은 생산돌격대로 조직됐으며, 모든 농가에는 책임생산량이 부과됐다. 성출의 대상은 양곡을 넘어 원면, 누에, 짚 제품, 육류, 심지어는 산나물에 이르기까지 확대됐다.

현물세와 성출제의 압박으로 북한 농민은 일찍부터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북한 농민은 총독부와 지주제로부터는 해방됐지만 보다 강력한 전체주의 국가에 예속됐다.

산업의 국유화

1946년 8월 북한 당국은 ‘중요산업국유화령’을 발포했다. 그에 의해 중요 공업시설이 일거에 국유화됐다. 동년 말 북한에서 국영경제가 차지한 비중은 기업 수의 90%, 공산액의 72%에 달했다. 소규모 수공업자와 자본가가 존속했지만 1947년부터 생산합작사나 협동조합으로 조직됐다. 그 위에 사회주의적 계획경제가 출범했다. 해방 후 북한의 광공업은 남한에서와 마찬가지로 심한 혼란에 빠졌다. 공장이나 광산은 지방 인민위원회에 접수됐으며, 일본인 자본가와 기술자는 추방됐다.

처음 4개월 동안 소련군은 수풍댐 발전기 등 주요 시설을 철거했는데, 이후 약탈은 멈췄다. 광공업의 회복을 위해 소련군은 일본인 기술자의 직장 복귀를 독려했다. 그들에게는 주택과 월급이 넉넉하게 주어졌다. 일본인 기술자는 그들이 건설한 공장에 대한 애착으로 또는 공산주의에 대한 공감으로 그들의 기술을 북한 젊은이에게 전수했다.

1947년 9월 흥남에서 일본인 기술자를 교원으로 하는 공업대학이 설립됐다. 그들은 1947년 봄 일본과 소련의 교섭이 성립하자 귀환하기 시작했으며 1948년 7월까지 대부분 철수했다. 1948년 북한의 공산액은 1944년의 67% 수준으로 복구됐다.

신인간

북한의 공산세력은 주민의 사회주의적 동원과 통제를 위해 새로운 인간형을 제시했다. 지주, 자본가, 지식분자, 개인주의, 이기주의 따위는 구인간을 상징했다. 이런 부류의 인간은 일반 인민으로부터 철저히 구획되고 배제됐다. 북한의 지식인들은 공산주의 조국 소련에서 신인간의 전형을 발견했다. 그들이 보기에 계급 착취가 사라지고 관료제가 폐지되고 인간들이 몰인격으로 헌신하는 소비에트 현실은 영원히 축복받을 인류의 재탄생이었다.

그렇지만 무슨 이념과 주의로는 인민을 신인간으로 개조할 수는 없었다. 이념과 주의는 너무나 손쉽게 한 인격으로 대체됐다. 항일 무장투쟁을 승리로 이끈 불굴의 영웅 김일성 장군이었다. 신화가 쓰이기 전에 주인공부터 선발됐다. 1946년 7월 김일성종합대학이 건립됐다. 공자는 인간은 나이 30에서야 독자의 인격으로 선다(而立)고 했다. 이제 겨우 선 34세의 젊은이를 우상으로 받드는 대학이었다.

신화의 진실

그 젊은이가 얼마나 항일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북한이 발간한 그의 전기는 모두 7종인데, 쓸 때마다 내용이 부풀려지고 이전의 것은 폐기됐다.

그는 1912년생이며, 본명은 김성주였다.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했으며,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가 중국인 유지와 재혼했다. 그 덕에 지린(吉林)의 유명 사립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하지는 못했다. 가출한 그는 10여 명의 동패와 비적 활동에 종사했으며, 위험에 처하자 양세봉이 이끈 독립군에 참여했다.

이후 언젠가 중국 공산당의 항일연군에 소속했다. 1937년 보천보라는 마을을 습격한 항일연군 소부대의 지휘관 김일성이 김성주가 아님은 거의 확실하다. 그 김일성이 전사한 뒤 새롭게 편성된 부대의 지휘관 김일성이 과연 김성주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그 부대는 관동군의 토벌을 피해 1940년 소련으로 넘어갔으며, 1945년 당시 김성주는 부대장으로서 소련군 대위의 신분이었다. 소련군은 그에 관한 보고서에서 특별한 전공은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대원수 스탈린이 그를 북한의 통치자로 발탁한 것은 그가 소련군 장교이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으로 개칭한 김성주가 소련 군적을 정리하는 것은 1957년의 일이다.

역사의 신은 이 같은 이력의 젊은이를 신인간의 상징으로 받든 그 나라의 앞날이 ‘노예의 길’밖에 없음을 예고했다. 그 비극의 역사는 이 연재의 대상이 아니다. 자료가 태부족인 데다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