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렴 비서실장의 원폭 피폭 경험
출처 : 조갑제의 박정희 전기
.... 유신 시절에 여당은 사실상 정보부에 종속되어 있었다. 朴 대통령은 정당, 군대, 치안, 정보기관은 자신이 직접 관리하면서 경제는 金正濂 비서실장에게 거의 전담시켰다. 1969~1978년까지 9년 3개월간 金 시장은 사실상 경제담당 부통령이었다. 그는 청와대 경제 비서관들과 경제장관(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 포함) 및 금융기관과 경제연구소들을 총괄적으로 지휘했다. 全斗煥 정부 시절 金在益 경제수석비서관이 全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경제정책 수립, 집행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김정렴 실장의 역할은 그보다 훨씬 컸고 오래였으며 범위가 넓었다.
다만 김 실장은 자신을 '도승지'라고 부르면서 철저하게 드러내지 않고 일했고, 朴 대통령이 죽은 이후에도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의 막강했던 역할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외유내강한 김정렴 비서실장은 朴 대통령에게 지시받을 때는 항상 부동자세를 취했다고 한다. 아주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그는 公的인 일에 대해서는 차가울 정도로 냉정하고 엄격했다... 그는 청와대 참모들을 군대식으로 지휘했다. 金 실장은 유신의 통치철학을 청와대 비서실의 운영에서부터 실천했다. 유신의 모토였던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대통령 이상으로 실천한 것이 金 실장이었다.
그는 금융인 출신 경제관료로 유명했지만 日帝시대엔 일본군 장교 생활도 짧게 했다. 강경상업을 졸업한 그는 '규슈'(九州)의 오이다 高商에 들어갔다. 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구마모토' 예비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장교교육을 받았다. 그 때의 심정을 그는 회고록 <한국경제정책 30년사> (중앙일보)에서 이렇게 썼다.
<이왕 징집된 이상 인간답게, 남아답게, 씩씩하게 그리고 한국 출신 아무개는 일본인보다 더 훌륭했다는 평을 듣고 죽어 가겠다고 생각했다. 이왕 죽을 바에는 조국의 독립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값있게 죽어야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훈련, 작업, 내무반 생활 등 모든 생활 및 행동 면에서 '조센징이지만 돼먹었다'는 소리를 듣고자 노력했다. 朝夕의 완전군장 軍歌구보 때는 나도 힘이 들었지만 낙오하려는 동료의 소총을 대신 메고 뛰었고, 숙제와 시험 준비를 하는 시간에도 늘 기꺼이 사역에 자원했으며, 동료의 몫까지 거들었다. 육체적 고통은 격심하였지만 정신적으로는 홀가분한 나날을 보냈다.>
1970년대 유신체제의 사령탑에 앉아 있었던 朴 대통령과 金 실장은 일제 때 장교생활을 하면서 국가주의적인 정신력을 단련했던 사람이고,이런 자세가 체제의 운영 면에서 반영되었다.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한국 지도층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으나 일제시대의 교육과 체험을 통해서 독립정신, 투지, 국가관, 공인의식의 소양을 갖춘 이들이 많았다.
지금 일부 좌파세력들이 이런 사람들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위선적인 형식논리이다. 식민지 시대에 宗主國(종주국)이 제공하는 선진문물을 배워서 기필코 독립을 쟁취하고 되찾은 조국을 위해서 배운 지식을 바치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제3세계의 독립과 건국의 지도자가 된 것은 戰後 세계적인 추세였다. 인도의 네루와 간디, 아프리카 대부분의 독립,혁명 지도자들, 그리고 싱가포르의 이광요나 말레이시아의 마히티르 같은 이들이다.
유신체제의 참모장 역할을 했던 '군인적 민간인' 김정렴(金正濂)은 1945년 8월 6일 아침 '히로시마'에 있었다. 그의 생생한 증언은 역사적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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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군관구(軍管區) 교육대에서 견습사관으로서 再교육을 받고 있던 우리는 그날 아침 교육대 교정에 모이고 있었다. 열중의 누군가가 "저기 B29가 간다"고 소리치기에 상공을 쳐다보니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하얀 비행운(飛行雲)을 끌면서 거의 30도 각도로 상승하는 B29 한 대가 보였다. 아침의 강한 햇살을 받아 그 B29는 반짝반짝 빛났다.
그 전날 하루 종일 파상내습으로 공습경보가 계속 발령 중에 있었으므로 사이렌도 울리지 않았으며, 폭음도 들리지 않았다. 정찰비행이겠지 하는 순간 사진 찍을 때 터지는 마그네슘 광선보다 더 강한 황백 광선이 번쩍 하더니 갑자기 천지가 암흑으로 변했다. (그 때가 오전 8시 15분이었다).
새까만 밤이 된 것이다. 동시에 불덩이가 등에 붙는 듯하더니 몸이 공중에 떴다가 땅에 떨어졌다. 이 순간 나는 소이탄의 집중공격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다. 암흑 속에서 "소이탄이다! 대피. 대피!" 소리치면서 지면을 구르며 옷에 붙은 불을 끄고 방공호로 뛰어갔다.
그러나 폭탄은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지평선에서부터 암흑이 걷히기 시작했다. 아침이 다시 오는 것 같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교육대 바로 뒤의 거대한 히로시마城이 돌과 흙과 목재의 더미로 변해 있었다. 교육대 교사는 廢목재를 쌓아놓은 모양으로 변해 있었고, 해안 방면을 보니 큰 연돌 몇 개와 철근 콘크리트組 고층건물의 골조가 몇 개 보일 뿐 히로시마 시내의 건물은 모두 파괴되어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등에 화상을 입었다. 눈, 코, 입만 남겨놓고 얼굴 후두부와 목에 화상을 입어 피부가 떨어져 나갔으며, 좌우의 손에도 화상을 입었다. 새끼 손가락 부분은 살점이 날아가 뼈만 앙상하게 보였다. 그래도 나는 中정도의 상처에 속했다. (중략).
한참 걸으니 강둑에 다다랐다. 人山人海인데 화상과 부상을 당한 시민과 군인들이었다. 이때 기차가 철교를 지나가는 것과 같은 굉음이 들리기에 사방을 살펴보았더니 불덩어리의 회오리바람이 선풍을 일으키면서 돌진해 오는 것이었다. 나는 둑 아래로 뛰어내렸다. 불덩어리의 회오리바람은 방향을 바꾸었다.>
金 소위와 원자폭탄을 맞은 교육대는 폭탄이 터진 폭심(爆心)에서 2 km 이내에 있었다. 金 소위는 오카야마 연대에서 50명의 견습사관을 인솔하여 교육대에 왔기 때문에 동료들이 피폭당한 뒤 어떻게 되었는지 행방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히데히라 마코토라는 동료 견습사관과 함께 아수라장이 된 히로시마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절반 정도를 찾아내 오카야마로 보냈다.
金 소위는 인솔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4일간 방사능이 남아있는 시내를 돌아다닌 것이다. 그는 오카야마 원대에 복귀한 뒤에야 병원에 입원했다.
이 병원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원자병을 앓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몽땅 빠지고 열이 40 도씨까지 올랐다. 옆 병상에서는 환자들이 하나둘씩 죽어가고 있었다. 일본이 항복한 후 그래도 질서가 유지되던 軍 병원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하나둘씩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때 원자폭탄이 투하될 때 함께 인솔자의 의무를 다했던 히데히라 사관이 아버지와 함께 金 소위를 찾아와 자신의 고향에 함께 가자고 했다. 오카야마 山地에 있는 히데히라의 본가는 양계농장이었다. 이 집에서 金正濂 씨는 친구와 함께 치료와 간호를 받았다. 히데히라의 아버지는 의사를 데리고 와서 아들과 金 소위를 최선을 다해서 치료해 주었다. 원자탄 피폭자에 대한 치료법이 알려지지 않은 상황인데도 의사는 스스로 개발한 혈청주사 치료를 해주었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金 소위를 살렸다고 한다.
10월에 金 소위의 형이 찾아와 그를 데리고 귀국했다. 히데히라는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1954년 한국은행에 근무하던 金 소위는 히로시마에 들른 길에 거기에 있던 미국의 원자폭탄 희생자 병원에서 진료를 보았다고 한다. 의사들은 金 소위가 爆心(폭심) 가장 가까운 곳에서 생존한 사람이란 측면에서 매우 흥미를 가지고 진료했다. 진료 결과 金 소위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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